[정신건강에세이] 앤 섹스턴과 실비아 플랫(II)
앤 색스턴에게 우울증은 너무 자주 재발하여 일생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1957년에 그녀는 다시 자살을 기도했다.병원에서 퇴원하면서 당시 보스턴의 몇 개 창작 그룹에 참가했다. 여기서 그녀는 로버트 로월, 조지 스터벅, 맥신 쿠민 그리고 실비아 플랫 같은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시작 활동을 벌였다.
앤 섹스턴은 실비아 프랫과 마찬가지로 시는 자신들의 인생을 반영해주는 도구로 생각했다. 그녀들의 시가 워낙 탁월한 점도 있었지만 독자들은 시를 통해 시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열광했다. 당시 독자들이 매일같이 겪고 느끼던 불안이나 공포를 이들 작가들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한 층 몰입되어 갔다.
섹스턴은 고백 시를 통해 당시까지 특히 여성작가들에게는 금기로 되어있던 간통, 약물 중독, 정신 질환, 자위행위, 근친상간, 낙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소망 같은 주제를 자주 시에서 다뤘다.
1959년 뜻하지 않게 부모가 모두 사망했다. 그녀의 우울증은 다시 재발했다. 시를 쓰는 것만이 그녀에게 안정을 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 해에 ‘독자가 주는 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기에게 의지하던 아내가 일약 유명인사가 되는 것을 참지 못한 남편 케이요는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런던에서 살던 실비아 플랫의 남편은 1962년 다른 여자를 만나 그녀의 곁을 떠났다. 다음 해인 1963년, 그녀는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시집 ‘종모양의 유리단지’(The Bell Jar)는 발간 즉시부터 영미 문단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발간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위해 저녁 식사까지 준비해놓은 다음 머리를 오븐에 넣고 개스를 틀어 자살하고 말았다.
실비아의 자살 소식을 들은 앤 섹스턴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오히려 크게 났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상담을 받던 정신과 의사에게 “실비아의 죽음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나를 더욱 죽게 싶게 만드니까요. 그녀는 내 것을 빼앗아 간 느낌이에요. 죽음은 내 것이었는데.”
그 후 앤 섹스턴에서 죽음에 대한 집념은 점차 증가되었다. 그녀는 죽음이란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당시에 지은 그녀의 시 “실비아의 죽음” (Sylvia's Death)에서 그녀는 그런 분노와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도둑년! 어떻게 너는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진지하게 원했던 죽음 속으로/ 혼자서 살짝 기어 들어갔는가./ 우리는 죽음을 극복했다고 얘기했었지/ 때로는 우리의 빈약한 유방 위에 그것을 당당히 달아놓고/ 우리 서로 자주 이야기를 늘여놓으면서/ 보스턴에서는 아주 진한 마티니를 석 잔씩이나 마셨지./ 정신분석가나 치료에 대해 말해준 죽음/ 마치 계획을 세워놓은 신부 같이 이야기해 준 죽음/ 그 동기와 함께 감쪽같은 조용한 실현을 위해/ 우리의 술잔을 비워준 죽음.”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74년 10월, 46세에 불과한 앤은 보트카 한 잔을 목에 깊숙하게 털어놓은 후 어머니가 입던 모피 코트를 깨내 입은 다음 차고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녀는 빨간 색 큐가 자가용 차에 엔진을 틀었다.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면서 배기 개스를 마시고 자살에 성공했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