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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맨발의 여자

이계숙(자유기고가)

밤늦게 슈퍼마켓에 갔다.
냉장고가 텅텅 빈 지가 오래지만 늑장을 부리며 미루다가 결국 먹을 게 없어 손가락을 빨 정도가 되어서야 장보기에 나선다.옷이나 신발 사러가는 것은 매일 가래도 가겠는데 식료품 쇼핑은 왜 이리 싫은 것일까?온 김에 한달치 식료품을 잔뜩 수레에 담아 계산대에 섰는데 앞에 선 여자의 맨발에 눈길이 가 머문다.며칠전 내린 비로 기온이 거의 영하의 날씨에 가까운데 여자는 맨발에 발가락 만 끼는 샌들차림이다.그래도 추위는 느꼈는지 위에는 스웨타를 세 벌이나 겹쳐입고 거기다 목도리까지 목에 둘레둘레 둘렀는데 얇디얇은 여름 치마 밑으로는 맨종아리이다.얼굴을 보아하니 동남아쪽 여자인 것 같다.
날씨와 장소에 동떨어진 여자의 차림새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온다. 슈퍼마켓에 갈때마다 늘 목격하게 되는 동남아 여자들의 맨발,그녀들은 왜 양말을 신지 못하는 것일까?
여름도 아닌 한겨울에 슬립퍼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여자의 발을 공공장소에서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못하다. 거기다 발톱이나 발가락의 시커먼 때라도 보는 날엔 '집구석에 그 흔한 양말 한 켤레도 없냐,제발 그 못생긴 발 좀 가리고 다녀라'고 소리를 질러주고 싶다.특히 내 앞에 선 여자처럼 한겨울에 맨발로 다니는 여자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허리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이다. 머리를 기르는 것이 그네들 나라의 풍습인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아이들 같으면 청순해 보이기나 할텐데 나이도 지긋한 여자들의 물귀신같은 긴머리는 그녀들의 맨발 만큼이나 보기가 싫어 아예 고개를 돌리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럴까? 그전의 손님에게는 인사도 잘하고 상냥하게 웃던 캐시어가 맨발의 여자엔겐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대해주는 것 같다.하루에도 가지각색의 사람 수백명을 상대해야 하는 캐쉬어라는 직업도 참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한 겨울 한밤중의 맨발의 여자야 카운터에 가려서 안보이니 그런다치고 한여름에 웃통을 훌러덩 벗고 다니는 남자들은 어떻게 대할까 참 궁금하다.
겉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쩔수없이 우선 겉모양만보고 사람을 가름하게 된다.벗은 거지는 못얻어 먹어도 입은 거지는 잘 얻어먹는다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대우을 받으려면 우선 거기에 맞는 차림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또한 미국이 아무리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나라지만 개인의 자유를 따지기에 앞서 공공의 장소에서는 갖추어야 할 예의라는 게 있다.슈퍼마켓에 가면서 의관을 정제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보기싫은 곳은 가리고 가는게 예의가 아닐런지.
미국오기 전 조선일보에 글이 하나 당선된 적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10만원 이상 되는 원고료를 받으려면 직접 신분증을 지참하고 조선일보사를 방문해야 했다. 원고료를 받아서 시장에 들러 옷가지를 좀 살 예정이었던 나는 최대한 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겨울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우리집에는 검정 털신이 한 켤레 있었다.시골 촌부들이나 신었을 듯 한 모양이 별로 좋지 못한 신이었는데 이게 기가 막히게 뜨듯하고 발이 편했다.시장을 돌아다니려면 발이 편해야 하니까 그 털신을 신었다.그리고 집에서 입던 옷차림에서 잠바만 하나 걸쳤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조선일보사를 찾아가긴 갔는데 경리부 아가씨의 눈치가 영 떨떠름했다.당선 된 글의 원고료를받으러 왔다고 하니까 이 아가씨가 돈을 줄 생각은 않고 몇번씩이나 그 글을 쓴 사람이 맞냐고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차림새 때문이이라곤 꿈에도 생각못한 나는 주민등록증 대신 여권을 가져가서(미국온다고 주민등록증은 국가에 반납했었다)까다롭게 구는가,하고만 생각 했었다.연신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여권사진과 나를 대조해 보던 아가씨가 마지못해 돈을 세는 걸 보다가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내 차림새,바로 내 차림새 때문이었다.볼품없이 묶은 머리에 후줄근한 옷차림, 거기다 다 낡은 털신을 신은 내 모습은 영락없는 길가의 군고무마 장사였다.작가 김주영씨가 몇백편의 글중에서 가려 뽑았다는 수준높은(?)글의 주인공이 군고무마 장사같은 차림새로 원고료를 타러 오리라고는 그 아가씨도 예상을 못한건 당연했을 터였다. 원고료를 받아 나오면서 뒤통수가 얼마나 뜨겁던지..아무리 상금을 받아 바로 시장엘 갈 길이었지만 다른데도 아니고 신문사엘 찾아가면서 그런 차림새로 간 건 내 실수였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미국에 오래 살다보니 갈수록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쓰게 된다.특히 급한 외출이라도 하게 될 때는 집에서 입던채로 그냥 뛰어나가게 될 때도 있는데 그럴때도 나는 차고 벽에 걸어놓은 거울에 매무새를 대충 점검한 다음에야 집을 나선다. 누가 나를 조선일보사 아가씨 같은 눈길로 쳐다보는 것은 일생에 단 한번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조선일보사 아가씨와 같은 눈길로 지금 내 앞에 선 맨발의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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