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아가씨가 저 멀리서…그림같은 '토지'
박경리의 '토지' 배경 평사리 악양 들판
섬진강·지리산에 둘러싸인 '비옥한 인심'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지리산 형제봉이 흘러내려 섬진강과 만나는 곳, 악양 들판이 펼쳐진다.
반듯 네모난 논들은 서로 다른 색으로 익어가며 한폭의 수채화를 그렸다. 봄에는 청보리로 푸르고, 가을에는 살찐 벼들이 노랗다.
80만 평의 들판은 넉넉하다. 농부들에게는 풍성한 수확을, 나그네에게는 풍요한 풍경을 선물한다.
그리고 한국 현대문학 100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을 낳았다. 고 박경리 선생의 '토지'다.
김화순 하동군 문화해설가는 "토지의 무대를 고민하던 선생이 외동딸과 이 들판을 지나다가 무릎을 쳤다"고 했다. 섬진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 병풍처럼 둘러싼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가 토지의 든든한 배경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토지는 만석지기 최참판댁의 외동 딸 서희와 그 주변 인물들이 그려내는 우리 민족의 서사시이다. 소설의 무대는 경남 일대와 일본, 만주까지 펼쳐지지만 평사리 악양 들판이 시작이다.
악양들 한복판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마주보고 서있다. 넓은 들판에 섬처럼 보이는 나무들은 토지의 두 주인공 서희와 길상처럼 다정하게 서 있어 '부부송'으로 불린다. 부부송 아래엔 중국 악양의 동정호를 따라 이름 붙여진 동정호가 소담스럽다.
악양 들판은 소설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이다. 김 해설사는 "소설을 실제라고 믿은 독자들로부터 최참판댁이 어디냐는 문의가 오래도록 많았다"고 말했다.
2001년 하동군은 악양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소설 속의 최참판댁을 재현해냈다. 9529㎡부지에 들어선 최참판댁은 전형적인 조선후기 반가(班家) 고택이다. 별당과 안채, 사랑채, 문간채, 중문채, 행랑채, 사당 등이 일자형으로 이뤄져 있다. 서희가 머물렀을 별당에는 연못이 고즈넉하다. 개관 이후 10년간 300만 명이 찾아 관광명소가 됐다.
소설 토지를 통해 글의 향기(文香)를 맡는다면, 산기슭에선 차향(茶香)을 고향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다. 하동은 우리나라 차 재배가 시작된 곳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령이 차나무의 종자를 가져와 심었다. 지리산 기슭의 야생차밭은 그 이후 1200년간 하동을 지키고 있다. '도심다원'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000년 넘은 차나무도 우뚝 서있다.
하동에서는 전체 농가 1만 100여 가구 중 1700여 가구가 녹차를 기른다. 재배면적은 500㏊로 전국 차밭의 23%다. 보성녹차와 차이가 있다면 하동의 차는 야생이다. 지리산 이슬을 먹고 자란 야생 녹차는 자연 그대로 은은하다.
글과 차향이 가득한 악양면은 '느린 삶의 미학'을 추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2009년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슬로시티로 인증했다. 차 재배지로는 세계 최초의 슬로시티다. 슬로시티는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치타슬로'에서 유래됐다. 인구 5만명 이하의 작은 도시로 친환경정책과 유기농 식품 생산.소비, 전통 음식 및 문화 보존 등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한다.김 해설사는 "하동에서는 빨리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눈이 바빠 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동을 어슬렁거렸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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