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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초판 (1919년)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위치 재정립

 칼 바르트를 이야기하지 않고 20세기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20세기 초, 역사적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적 사고의 엄밀성에 밀려 기독교 신학의 존립에 위기가 닥쳐왔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류의 진보를 맹신하던 철학자들은 기독교의 종교성을 부정하고 있었다.

 칼 바르트의 역사적 사명은 ‘신학함’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림으로써 기독교와 교회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가 강조한 기독교 신앙은 ‘초월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유한한 인간’의 진지한 자기고백이다. 20세기 초반의 유럽 기독교가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잊어버렸을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표현을 통해 다시 한번 기독교 신앙의 본래 자리를 찾게 만든 것이다.

 스위스 작은 탄광촌 사펜빌(Safenwil)의 이름없던 목사였던 칼 바르트가 1919년에 출간한 <로마서 주석> 은 이러한 새로운 기독교 갱신의 첫 걸음이었다. 이 책의 출간을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한 바르트의 신학을 어떤 역사가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표현하였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19세기 신학과 단절된 상태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시대의 신학에 대한 철저한 검증에서 시작됐다. 우선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규정한 쉴라이어마허에서부터 출발한다. 독일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던 쉴라이허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은 교리체계나 선량한 시민이 되기 위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었다. 종교는 학문적 논의나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쉴라이어마허는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만이 무한하신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였다.

 쉴라이어마허가 칼 바르트의 신학형성에 종교적 영향을 미쳤다면,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영향은 바르트 신학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키엘케고르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하고 질적인 차별”로 정의된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존재인 인간 사이에 어떠한 접촉이나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키엘케고르의 사상은 당시 유럽철학의 바탕이 되고 있던 헤겔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바르트의 초기 신학은 교회와 목회의 현장에서 태동하였다. 특별히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선에 위치한 작은 탄광마을 사펜빌에서의 목회(1911-1921)는 젊은 칼 바르트의 신학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칼 바르트가 사펜빌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을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사건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발발과 유명한 <로마서 주석> 초판의 발행(1919년)이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목회에 전념하던 그는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反) 기독교적인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독일의 명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칼 바르트는 자기를 가르친 신학교수들의 반기독교적인 변신을 목격하면서 자유주의와 역사 실증주의에 빠져있던 그들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까이 교제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도 그를 실망시키기에는 마찬가지였다.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둘러싼 독일교회와 신학자들의 국수주의에 분노를 느낀 칼 바르트는 이때, 키엘케고르의 유명한 표현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 위에 있다”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어떠한 인간의 이해나 해석도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음을 선포하였다. 독일의 신학자들이 카이저 빌헬름 2세의 군국주의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축복하고 있을 때, 바르트는 로마 교회로 향한 바울 사도의 편지를 주석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他者, der ganz Andere)로서 인간의 인식과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서 계신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단순하게 들리는 이 표현이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초판을 통해 발표되었을 때, 유럽의 신학계는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신학의 핵심이 바르트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지난 세기를 지배하던 자유주의 신학 대신, ‘초월하신 하나님’이 신학의 주제로 다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신정통주의,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의 신학으로 불려온 칼 바르트의 신학은 수많은 ‘바르티안’의 출현과 동료 신학자들 간의 상호 영향을 통하여 20세기 신학의 주도적인 흐름으로 발전되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인간에게 전달되는가에 대한 문제로 에밀 부르너와 논쟁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성서와 더불어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에밀 부르너의 의견에 대해 칼 바르트는 (아니오!)라는 반박논문을 발표하면서, 오직 성서만이 ‘계시의 근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34년 나치 정권의 어용교회를 비판한 칼 바르트의 ‘바르멘 선언’은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적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참된 계시이며 교회는 그 사실을 선포하는 곳임을 재확인한 바르멘 선언은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 어용교회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결국 바르트는 독일 본 대학에서의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자신의 고향에 위치한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된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20세기 교회일치 운동의 이정표인 세계교회협의회(WCC)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20세기 기독교의 신학의 이정표가 되었다. 1932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교회 교의학> 에서 우리는 성숙한 칼 바르트의 신학을 만나게 된다. 극단적이기조차했던 젊은 바르트의 ‘하나님의 초월’에 대한 강조는 어느 정도 완화되고, 대신 기독론 중심의 신학과 교회를 신학의 현장으로 보는 원숙함이 드러나고 있다. 젊은 바르트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접촉점도 거부함으로써 ‘신학함’의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면, 후기의 바르트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의 주제로 붙듬으로써 20세기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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