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사건] 8. 동서 교회의 대분열 (1054)
서로 다른 공용어와 신학상 차이로 갈등
이천년 역사중 교회는 크게 두 번에 걸쳐 대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사도적 전승을 이어받아 한개의 보편(Catholic) 교회로 유지되어 오다 1054년의 ‘동서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을 통해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됐다. 또 서방교회는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Catholics)과 개신교회(Protestants)로 갈라졌다. 오늘은 기독교 역사의 첫번째 대분열로 간주되는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의 대분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동서교회의 분열의 조짐은 사실 1054년 이전부터 나타났다. 우선 동서방교회는 사용하는 공용어가 달랐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할 동안 동방교회의 예배와 신학은 헬라어로 표현됐다. 이러한 공용어의 차이는 신학의 차이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의 신학을 대표하던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주로 성경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했다면 서방교회의 대표격인 안디옥 교회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 충실한 성경해석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동서방교회에서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신학적 의견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학적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해석에서 두드러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서방교회의 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완벽한 신격과 인격의 존재는 동방교회 신학자들에게 마치 예수가 두개의 ‘본성’(Nature)을 가진 것처럼 이해되어졌다. 동방교회는 이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한개의 본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이 동방교회의 신학적 노선을 ‘모노피사이트(Monophysites)’라고 한다. 이 전통에 따르면 예수는 절대적 신성이라는 ‘한개(Mono)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방교회의 ‘두개의 본성’에 대한 신학은 예수의 절대적 신성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절대적 강조는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의미첨가로 연결되었다.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라면, 그 예수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는 결국,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Mother of God)’가 된다. 이러한 마리아에 대한 동방교회의 신학적 의미 부여는 결국 서방교회와의 갈등을 계속 심화시켰다. 8-9세기 동안의 성화숭배 전통(Iconoclasism)을 둘러싼 신학적인 논쟁(726-843)또한 동서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흔히 동서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로 불리는 1054년의 사건은 이러한 장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동서교회의 대분열은 유럽 북방에 살던 노르만족들의 남침으로 야기된 서방교회의 위기의식과 샤를마뉴 황제의 성령론(Filioque)에 대한 동방교회의 반대라는 역사적 배경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다.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서방교회의 지도자 교황 레오 9세의 비타협적인 교권행사와 동방교회의 지도자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마이클 케루라리오스(Michael Kerularios, 1043-1058)의 배타적인 성격차이에서 비롯됐다.
필리오케와 성화숭배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가지고 있던 동서방교회는 1052년 케루라이오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서방교회가 헬라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한다. 물론 케루라리오스의 이러한 요구는 서방교회가 이탈리아에 있던 동방교회에게 라틴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의 요구를 거절하자 케루라리오스는 서방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또한 서방교회 성례전의 누룩을 넣지 않는 떡을 동방교회의 성례전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054년 교황 레오 9세는 특사자격으로 추기경 훔벌트(Humbert)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대표격였던 대주교 케루라리오스는 훔벌트와의 면담을 거절했다. 그러자 훔벌트는 헤기아 소피아 성당의 제단에 교황의 칙서를 남겨놓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버린다. 훔벌트는 필리오케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동방교회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말았다. 결국, 서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를 파문시키고, 반대로 대주교는 홈벌트가 남기고 간 교황칙서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서교회의 대분열이라는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1054년).
분열 이후 서방교회가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엄밀한 논리를 강조하는 신학이 발전되었다면, 동방교회에서는 예배와 성례전을 강조하는 경험적이며 신비적인 신학이 발전하였다. 삼위일체를 비롯한 동서방 교회의 하나님 이해 역시 다른 부분이 각각 강조되었다. 서방 교회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인간의 죄를 대신한 ‘희생의 속죄물’임을 강조한다면, 동방교회는 ‘부활의 승리자’이신 예수를 더 강조한다.
로마 교황청의 교권을 강조하는 서방교회의 전통 존중과는 달리 동방교회는 사제들의 평등한 관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차이점이다.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하는 동방교회의 전통과는 달리, 서방교회는 지금도 사제들의 독신을 원칙으로하고 있다. 그러나 동서방 교회가 분열의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 것은 제 4 차 십자군 운동으로 인한 동서방교회의 충돌 때문이었다. 서방교회의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를 약탈하고 교인들을 살륙하는 사건이 발생하여(1204년), 동서방교회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아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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