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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의 시선] 한 무신론자의 교황 읽기

신준봉 논설위원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최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 『희망』(가톨릭출판사)을 ‘감명 깊게’ 읽었다. 고백하자면 발췌독이었는데, 전체 25개 장 가운데 제목에 끌려 내키는 대로 펼쳐도 밑줄 긋고 싶은 대목이 적지 않았다. 불쑥 읽기 시작한 거의 모든 곳에서 독서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가령 1969년 사제 서품 전후의 내면을 소개한 16장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의 감동
민감한 과거도 이례적으로 소개
가장 개혁적이었다는 점은 불변

“현실은 중심보다 변방에서 더 잘 보입니다. 한 인간의 실존적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만의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할 이유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대화가 시작되고, 타인의 생각이라는 변방이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공존을 강조하는 새로울 것 없는 얘기 같은가. 이전 교황들의 글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실존적 현실’ 같은 표현이나 타인의 생각을 변방과 등치시키는 수사법이, 이 분이 얼마나 구어체로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려 했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자서전을 직역한 이재협 신부의 도움말로 페미니즘식 여성성 강조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됐지만, 같은 장의 “교회는 여성입니다”라는 문장은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같은 장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신학적 색채를 삭제하면, 헛된 명분 아래 욕심을 가린 채 대권 놀음에 여념 없는 것 같은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요긴하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개념도 아니요, 신비적 차원에서 이상화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이 하는 모든 일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여기거나, 그들을 마치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백성을 신화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백성과 역사는 느린 걸음으로 빚어진다는 얘기인데, 교황의 ‘백성론’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백성을 하나의 ‘신화적 존재’로 그렸다는 논지로 이어진다. 대문호가 그려낸 신화적 백성이 죄인이고 비참한 존재였을 망정 “실존의 근본 구조 안에 뿌리박고 있으며, 공동의 소명 안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의미 안에서 살아가기에” 진정한 인간성을 대변한다는 얘기다. 세속적으로 번역하면 ‘고통받는 누구나 초월적인 삶을 꿈꾼다’ 정도이지 않을까 싶은데,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앵글로색슨 미디어들의 보도는 파고 파도 미담이라는 식의 국내 언론과는 결이 다르다. 영국 매체는 교황이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영유권 분쟁을 벌인 아르헨티나 출신이라서, 미국 매체는 보수적인 자국의 가톨릭 풍토를 반영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대체로, 프란치스코가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교황이었던 것은 맞지만 실제로 바꾼 건 별로 없다는 투다. 가톨릭 내 보수·진보 어느 편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교황의 흑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1976~83년 군부 정권에 의해 3만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더러운 전쟁’ 기간에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으로서 베르고글리오(교황의 본명) 신부가 야만을 막으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후 베르고글리오가 ‘다마스커스 모멘트(Damascus moment)’, 즉 회심의 순간을 경험하고 나서 더 급진적이고 겁 없는 사제가 됐다고 추정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은 율법에 엄격했던 바리새인이었던 성경의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를 체험하고 나서 회심해 예수 전도에 나선 사건을 가리킨다.

부역 거부였는지 공모였는지 베르고글리오의 선택이 명확히 해명된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 잡혀가는데 거세게 싸우지 않고 비교적 ‘안전한’ 길을 갔다고 해서 어디까지 문제 삼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자서전에서 프란치스코는 소상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이례적으로, 당시 납치됐던 두 예수회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밝혀 놓았다. 하지만 언론 보도대로 다마스커스 모멘트가 있었던 것인지 그의 내면을 우리가 알 길은 없다. 다만 자서전에 이런 대목은 있다.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에서 많은 것을, 때로는 매우 뼈저리게 배워야 했습니다.”

하필 1973년 예수회 관구장에 임명됐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에서다.

용서는 신의 영역이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인에게 보여준 개혁의 언행은 부정할 수 없다. 엄밀한 역사적, 신학적 평가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신준봉([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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