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주색·재물에 눈먼 왕, 왕조 몰락 재촉해
왕권으로 사익 추구한 28대 충혜왕

옳은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뭄에 마를 리가 있겠나. 세종은 새 나라 조선이 그렇게 무궁하기를 바라면서 갓 만든 훈민정음으로 순우리말 노래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다. 불과 두 세대 전에 고려 왕조가 흔들리고 말라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500년 왕조의 멸망, 그것은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중대한 사건이었다. 고려는 어쩌다 망했을까? 고려의 망국인(亡國因)은 직접적이고 가까운 근인(近因)부터 멀고 간접적인 원인(遠因)까지 다양할 것이나, 그 중간쯤에 충혜왕의 실정이 있다.
원 공주 출신 왕비 겁탈했다 압송
무당에도 세금 물려 사금고 채워
공무 망각하고 극단적 사익 추구
국왕 타락하자 간신들만 들끓어
결국 원에 잡혀가 유배길에 객사
공민왕 노력에도 민심 못 되돌려
무당에도 세금 물려 사금고 채워
공무 망각하고 극단적 사익 추구
국왕 타락하자 간신들만 들끓어
결국 원에 잡혀가 유배길에 객사
공민왕 노력에도 민심 못 되돌려
![충혜왕이 안장된 영릉(永陵). 1910년대에 촬영된 사진이다. 원 안에 흐트러진 석물이 보인다. 능의 정확한 위치는 실전돼 알 수 없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4/25/b3e895fe-bd06-4f30-b3bf-fc86a001bbd8.jpg)
원 책봉 받아 왕 된 후 납득 어려운 행적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차지했을 때 국가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금·남송을 비롯해서 서쪽으로 탕구트, 카라 키타이, 호레즘, 아바스 왕조 등 번성했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고려만은 국호와 왕실, 영토와 인민, 제도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남았고 그런 가운데서 원의 간섭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 운영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망국에 이르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서도 국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 다만, 외세의 간섭이 강한 때일수록 유능한 국왕이 나왔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충렬왕은 원의 간섭을 줄였지만 국내 정치에서 실패했으며, 충선왕은 자신감이 지나쳐 자멸하고 말았다. 충숙왕은 무능하고 정치에 무관심했으며, 충혜왕은 사욕이 앞서 패가망국(敗家亡國)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 다음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어렸다. 이 가운데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행적을 보인 것이 충혜왕이다.
![충혜왕 2년(1341)에 사경한 『불설아미타경』.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물로 그림을 그리고 은물로 글씨를 썼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4/25/09305016-7661-4e23-8523-04eebb684c4d.jpg)
새 궁궐 짓고 궁녀 시켜 직물 생산도
![고려의 문신 이조년(1269~1343)의 초상. 이조년은 충혜왕에게 직언을 마다치 않아 “담이 몸보다 크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4/25/c76a72d3-955e-4daa-b4d3-27c683a96b7a.jpg)
재산 증식을 위해 또 한 가지 한 일이 있었다. 바로 무역이었다. 왕과 교역하기 위해 위구르 상인들이 고려를 오갔고, 왕은 관리를 시켜 원에 가서 물건을 팔게 했다. 충혜왕이 주력 상품으로 생산한 것이 직문저포라는 직물이었다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는바(이강한, ‘어떤 제국과의 조우’)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궁궐에 생산 시설까지 갖추어놓았다. 새 궁궐을 짓고 그곳에서 궁녀들에게 직물 만드는 일을 시켰으며, 방아와 맷돌 같은 기구가 많이 있었다고 하니 영락없는 작업장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경영 수완을 그저 칭찬할 일이 아니다. 이 궁궐에 들어가 일하기를 거부한 여자 둘을 충혜왕이 쇠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잔혹하고 엽기적인 갑질 경영이었다. 무역의 이익은 당연히 충혜왕 개인의 몫이 되었다.
원에 아부하려 재산 모았다는 추측도
![개경 경천사지 십층석탑. 충혜왕을 압송했던 고용보 시주로 만든 탑이다. 고용보는 고려인 출신 환관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다가 돌려받아 1960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4/25/6a37aae2-2336-473d-9444-79a5ddea904b.jpg)
충혜왕의 말로는 더없이 비참했다. 원에서 개입해서 왕을 잡아갔다. 충혜왕의 무책임한 정치로 인해 고려에 대한 간섭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사신이 왕을 발로 차고 포박해서 대도(베이징)로 압송했고, 거기서 2만 리 떨어진 게양현(광둥성 지에양시)으로 유배했다. 충혜왕은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어 손수 옷 보따리를 들고 유배 길에 올랐고 도중에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국왕이 원에 잡혀가고, 멀리 유배 가고, 객사하는 비극이 연속되었지만 고려에서 원에 대한 반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다시 살날을 보게 되었다며 기뻐 날뛰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왕실에 대한 민심 이반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고 있었다.
충혜왕의 그림자는 짙고 깊었다. 그 뒤로는 충혜왕이 사익을 추구한 탓에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공민왕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끝내 민심을 되돌리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렀으니 충혜왕의 실정이 망국인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마침 정도전이 충혜왕 때 태어났다. 그가 훗날 정치사상을 정리하면서 무엇보다도 국왕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고, 권력이 국왕에게 있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틀림없이 충혜왕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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