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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의 푸드로드] 설국의 전호나물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검푸른 동해 바다 위 울릉도에서의 긴 밤을 빠져나오자 그 고장은 설국이었다. 지난 2월 말 학생들 졸업여행으로 갔던 울릉도에서 폭설과 풍랑으로 꼼짝없이 갇혔다.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울릉도 사람들은 이런 고립에 익숙했다. 요즘은 큰 배가 다녀서 고립되는 날짜가 지극히 줄었다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 울릉도에 한 달 여 갇히는 일이 꽤 있었다고 했다. 내가 만난 한 분은 갇혔던 한 달 동안 놀라운 울릉도 설경의 마법에 매료되어 아예 울릉도에서 고깃집을 하면서 눌러앉았다고 했다. 울릉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적설량이 많은 곳이다.

곧 개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강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숙소 측의 배려로 컴퓨터를 빌려 강의 준비를 짬짬이 하며 언제 다시 나갈 수 있으려는지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인간의 배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고파왔다.

폭설로 갇힌 울릉도에서 ‘영접’
향긋한 식감, 고립 근심 날려줘
산지 많아 발전한 우리 식문화

폭 1.5㎞, 길이 2㎞의 옛 화산 분화구, 나리 분지를 제외하고는 평지가 없는 울릉도에서 작물재배는 제한적이다. 섬 경사면에 비스듬히 매달려 명이와 부지깽이 농사를 짓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러나 때는 여전히 추운 2월이었다. 신선한 농산물이 아직 나올 시기가 아니다. 게다가 육지로 가는 배가 못 뜰 정도면 고깃배도 못 뜬다. 그래서 울릉도 사람들은 모든 식재료를 얼려서 냉동고에 수시로 보관하는 문화가 있다. 언제 고립될지 몰라서다.

모든 것을 얼려서 고립을 대비하는 울릉도에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지만 며칠간 고립된 상황에서는 신선한 식재료는 못 먹지 않을까? 따로 비타민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나? 이런 의심을 하며 눈으로 폭삭 덮인 저동항 인근 식당을 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설국 울릉도의 식당은 전호나물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내가 방문한 모든 울릉도의 식당 주인들은 눈 속에서 올라오는 전호를 캐어 왔다고들 자랑스레 말했다. 전호의 향은 두텁게 쌓인 울릉도의 눈밭을 아래에서부터 소곤소곤 뚫고 오르며 ‘그래도 봄은 오고 있어!’라고 알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전호나물이 처음이었다. 우리에게 이런 신기한 맛과 오묘한 향이 나는 식재료가 있었다니! 미나리의 향과 비슷하면서도 파슬리와도 친척인 것 같은 전호의 줄기 아래쪽은 아삭한 식감까지 있다. 울릉도에선 3월까지 난다는데 이미 그립다. 설국 울릉도에서는 전호를 살짝 데친 다음 들기름, 간장, 다진 마늘로 무쳐서 내는 집도 있었고, 익히지 않은 생 전호를 간장과 식초, 그리고 약간의 고춧가루로 새콤하고 아삭한 식감으로 먹도록 내는 집도 있었으며, 돼지고기를 구울 때 전호를 올려 함께 살짝 구워 먹도록 하는 고깃집도 있다. 섬에 갇혀 못 나가고 있는 나의 근심과 걱정을 전호나물의 향이 날려 주었다.

‘데쳐서 조물조물 무쳐낸다’라는 우리의 나물 조리법은 참 한국답게 들린다. 이런 조리법이 다른 문화권에 없는 건 아니지만 유독 한식에 데쳐서 조물조물 무쳐내는 조리법이 많다. 우리의 나물 소재로는 산에서 자라는 산채(山菜)의 활용이 특히 많다. 혹자는 예전에 먹을 게 없어서 산에서 자라는 온갖 풀들을 캐어 먹었던 것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산이라고 하는 지형이 언제나 우리 생활 속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서울만 하더라도 남산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산들과 함께 버무려져 있는 도시이고 부산은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공간을 따라 발전한 도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신기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런 거대 도시 중간중간에 솟아 있는 산, 그리고 그 산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사는 한국인들의 삶이다. 전 세계적으로 산이 도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그러니 산채를 활용한 나물이 유독 우리나라의 식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한반도에 태어났을 때 이미 나물과 함께할 운명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한 지역의 식문화의 정체성은 떼루아(Terroir, 생물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지형·토양 등의 요소)의 큰 틀 안에서 형성된다.

우리 밥상 위를 채우던 멋스러운 나물의 등장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나물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고 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되지 않으며 냉장고 안에서도 며칠 내로 쉬어 버린다. 간편함이 일상 음식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집에서 나물을 먹기가 점차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나물의 지위가 고급 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격상(?)돼 보일 정도다.

울릉도에 갇혀 매일 전호나물을 먹으며 비로소 인간이 되어 육지로 돌아온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했더니 전호나물을 아직 영접하지 못한 이들이 전호나물의 효능이 무언지 물어본다. 나는 전호나물은 너무 향긋하고 맛있어서 기분이 극적으로 좋아지는 효능이 있다고 답해줬다. 4월에는 두릅에 그런 효능이 있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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