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선종] '하늘나라 문지기' 2천년사…베드로부터 프란치스코까지
박해 딛고 종교·세속 권력화…'종교적 광기' 십자군원정 흑역사 면죄부 판매 등 부패·부정축재…현대에는 '평화·인권 대변자' 역할
박해 딛고 종교·세속 권력화…'종교적 광기' 십자군원정 흑역사
면죄부 판매 등 부패·부정축재…현대에는 '평화·인권 대변자' 역할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14억 가톨릭 신자의 정신적, 사회적 지도자이다.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교황은 예수의 으뜸 제자를 후계하는 성직자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최초의 교황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겠다"는 예수의 약속을 따라나선 시몬이다.
예수는 교회의 반석이라는 의미에서 시몬에게 바위나 돌을 뜻하는 이름 베드로를 부여했다.
가톨릭은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을 토대로 베드로를 천국의 열쇠를 지닌 교회의 첫 수장으로 간주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가 죽고 부활해 승천한 뒤 베드로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할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다 서기 64년께 순교했다.
교황이 있는 바티칸은 로마제국 황제 네로의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 묻힌 곳이다.
그 터에 훗날 건립된 성베드로대성당은 가톨릭의 주요 성지로 교황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베드로를 잇는 초기 교황들도 로마의 신과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제국의 분리독립을 획책하는 게 아니냐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그런 시련기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공동황제 리치니우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막을 내렸다.
밀라노 칙령에 따라 종교적 자유를 합법적으로 누리게 된 가톨릭은 로마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는 전례를 개혁해 그레고리오 성가 등 유산을 남겼고 앵글로섹슨을 개종하며 전교 활동을 확대했다.
가톨릭은 로마 내에서 식품 공급이나 도시 방어 같은 역할까지 했다. 교황의 지위는 종교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함께 강화됐다.
이 시절인 6세기부터 교황을 일컫는 '포프'(pope)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이는 '아빠'를 뜻하는 라틴어 '파파'(papa)에서 유래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로부터 756년 이탈리아 중부 영토를 기증받아 교황령(교황의 영지)의 토대, 즉 세속적 정치권력을 확장할 계기를 마련했다.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중세에 교황의 권세는 주변 군주들과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커졌다.
교회와 세속의 권력이 빚은 대표적 갈등을 보여주는 사태가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까지 지속된 서임권 투쟁이었다.
그 대표적 사태는 교황의 막강한 권한을 보여준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는 교황만 주교를 서임할 권한이 있다며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반목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끝내 명령을 거부하자 그를 파문했다.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에 찾아가 눈 속에서 맨발로 사흘 동안 파문 철회를 청하며 용서를 빌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그레고리오 9세(1227~1241) 등은 거대 군사작전인 십자군 원정을 주도했다.
이들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원정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탈환하겠다며 유럽 군주들과 병사들을 동원했다.
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영향력을 확장할 수단이었으며 종교적 광기에 따른 대량학살, 세속적 이익 추구 때문에 가톨릭의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교황권이 왕권에 굴복하는 시절도 뒤따랐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35∼1303)의 대립 속에 프랑스군은 1303년 이탈리아 북부 아나니에 있던 교황을 습격했다.
모욕과 구타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보니파시오 8세는 1개월 뒤 사망하고 이후 교황은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왕권에 짓밟힌 교황권은 이후 로마에서 쫓겨나 유배 생활을 하는 '아비뇽 유수'의 굴욕까지 겪었다.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까지 7대(1309∼1377)에 걸쳐 교황이 아비뇽에 묶여 프랑스 왕의 강한 영향력 아래 머물렀다.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으나 바닥에 추락한 교회 이미지는 쉽게 복구되지 않았고 교황 3명이 난립하는 분열까지 불거졌다.
그레고리오 11세가 1378년 선종한 뒤 로마와 아비뇽이 각각 교황을 선출해 대립하는 '대분열 시대'가 1417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독일에서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혼란 속에 탄생한 로마계, 아비뇽계, 공의회파 등 3명의 교황이 모두 폐위됐다.
마르티노 5세(1417∼1431)가 공의회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중세 교회의 분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정쟁과 부패에 찌든 가톨릭교회는 그대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고 다시 내홍에 따른 존립 위기를 맞이했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면죄부 판매를 허용해 교회의 부정한 돈벌이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개혁파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수도사제이던 마르틴 루터는 1517년 교회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해 나중에 급속도로 확산할 개신교의 뿌리가 됐다.
가톨릭은 개신교화하고 있는 유럽을 가톨릭으로 돌리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통해 루터파의 종교개혁에 반하는 자정 운동을 펼쳤다.
존립 위기 속에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재정비하는 등 자체적인 개혁을 주도했다.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교황으로는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 베네딕토 16세(2005∼2013), 프란치스코(2013~)가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의 국제적 영향력을 확인한 글로벌 리더로 주목받는다.
그는 냉전시대 종식과 맞물려 동유럽의 반공주의 운동을 지원했고 세계평화와 반전을 촉구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았으나 가톨릭 교리 수호에 힘을 쓰다가 건강을 이유로 생전에 퇴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초의 남미 출신, 예수회 출신 교황으로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가톨릭에서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빈곤퇴치, 반전부터 기후변화 대응, 여성권 증진, 성소수자 포용 등 세계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신앙인의 역할을 강조한 교황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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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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