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전신마비, 첼로 다신 못할줄 알았는데…기적 일어났다” [더 인터뷰]
살아있는 첼로 전설 미샤 마이스키
“6개월 전신마비, 이젠 사랑을 연주한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특유의 뜨거운 연주로 60년 동안 세계를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지난해 병으로 한동안 무대를 떠났다. 브뤼셀 현지 인터뷰에서 “내가 평생 누렸던 행운을 성화 봉송하듯 세상에 돌려주려 한다”고 했다. [사진 크레디아]](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4/18/0d4e806f-512c-4c7f-83ea-85dc41e10807.jpg)
마이스키는 가슴에 ‘MM’(미샤 마이스키), 등에는 ‘DAD’(아빠)라고 쓰인 점퍼를 입고 기자를 맞이했다. 모든 가족이 맞춰 입은 옷이라고 했다. “건강해 보인다”는 인사에 그는 목 뒤쪽에 세로로 난 수술 자국을 내밀었다. 우둘투둘한 상처가 길었다. “20㎝예요. 이 수술을 위해 병원에 5개월 있었어요. 심각했어요.”
마이스키는 196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데뷔한 이래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80년대부터 도이치 그라모폰의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방대한 음반을 발매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6월 척수 감염으로 온몸이 마비되면서 생전 처음 공연을 취소했다. 부상 소식을 많은 언론이 보도했다.
병 극복하며 가족·음악 의미 되새겨
작년 스트레스로 척수에 세균 감염
두 달간 침대에만, 근육 10㎏ 빠져
자녀들 덕분에 반년 만에 다시 회복
두 달간 침대에만, 근육 10㎏ 빠져
자녀들 덕분에 반년 만에 다시 회복

다시는 첼로를 연주할 수 없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그는 음악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았고, 또 그 행운의 빛을 마치 성화 봉송하듯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무슨 일이었나?
A : “지난해 여름, 나흘 정도 목과 어깨, 그리고 여기저기 통증이 계속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마비됐다. 그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움직일 수 없었고 바닥에 쓰러졌다. 크게 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휴대전화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15세인 내 아들이 오전 7시에 일어나 나를 발견했다. 척수에 발생한 심각한 세균 감염이었다. 원인은 아마도 스트레스일 것이라고 했다.”
Q :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궁금하다.
A : “처음엔 공연을 취소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다. 나는 평생 콘서트를 취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연 취소는 그 뒤로 6개월을 갔다. 두 달은 침대에만 누워 있었고 근육이 10㎏ 빠졌다. 두려웠다.”
Q : 무엇이 가장 두려웠나.
A : “평생 첼로를 연주해 왔는데 더는 할 수 없다는 생각. 올 1월에 77세가 됐는데 나이답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첼로를 잡으면 에너지가 넘쳤다. 아프기 직전 내 스케줄을 보라. 도쿄·미야자키·이스탄불·오슬로에서 잇달아 연주를 했다. 몸이 느려지거나 힘들어지는 데에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Q : 그러나 결국 회복해 냈고 루체른에서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어떤 과정이 있었나.
A : “처음에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그다음엔 물병을 들 수 있었다. 반년 만에 첼로를 들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보통 2년이 걸리거나 회복하지 못하기도 한다는 병이었다.”
Q :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됐을 때 무엇을 생각했나.
A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생각했다. 무엇을 먼저라고 말할 수 없다. 가족과 음악이다. 6명의 아이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재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줬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나를 보러 병원부터 들렀다. 사랑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Q : 음악, 또 첼로를 연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됐나.
A :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음악가였는지 절실히 깨닫게 됐다. 무엇보다 거기에 대해 큰 책임감을 다시 느꼈다.”
Q : 어떤 책임감인가.
A : “나는 로스트로포비치와 피아티고르스키라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운이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음악가가 너무나 많다. 나는 운 좋게 일이 잘 풀렸고, 공연 기회가 계속 주어졌으며 원하는 음반을 녹음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강력한 행운의 빛을 전달해야 하는 성화 봉송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Q : 병이라는 불운을 맞닥뜨리고 행운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A : “그렇다. 사실 음악가들은 자신이 얼마나 행운인지 깨닫기가 어렵다. 고달프기 때문이다.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에 내 선생님인 피아티고르스키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연주 후 너무나 고독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우리는 공연이 끝나면 참으로 외롭다. 화려함은 없다. 호텔로 돌아와 오전 2시까지 CNN을 보다가 8시면 짐을 싸고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삶이다.”
Q : 하지만 당신의 활동과 성격에서는 그늘을 발견할 수 없다. 고된 삶에서 어떻게 기쁨을 찾아낼 수 있었나.
A : “사람들과 감정을 나눠야 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보면 그들이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기쁘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음악가에게도 그런 과정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좋은 음악가’와 ‘위대한 예술가’가 갈리게 된다.”
Q : 위대한 예술가는 무엇이 다른가.
A : “자기 자신보다 음악 자체, 또 청중을 더욱 사랑한다. 음악을 좋은 소리와 완벽한 속도 같은 물리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그걸 마스터한 수천수만 명의 음악가가 있다. 그 기초 위에 예술적 수준의 완성품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심지어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다. 4000m의 알프스를 오를 때 마지막 100m가 가장 중요하듯,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예술을 완성하는 건 바로 사랑
청중 감동하려면 120% 힘 쏟아야 해
6월 3일 피아니스트 딸과 서울 공연
사랑 주제로 베토벤·브람스 등 연주
6월 3일 피아니스트 딸과 서울 공연
사랑 주제로 베토벤·브람스 등 연주
![1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무대에 복귀했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운데). 왼쪽부터 야니 얀센(바이올린), 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와 함께했다. [사진 플로리안 리임/WFIMC]](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4/18/4e2fe1d2-de9f-422f-a783-a07fb26aabd9.jpg)
Q : 이번에 한국에서 연주하는 곡들의 주제도 ‘사랑’이다.
A : “그것 말고는 우리가 잡을 방향이 없다. 인생의 마지막 날 무엇이 가장 중요할지 생각해 보면 안다. 병을 얻고, 극복하고 나니 더욱 잘 알게 됐다. 이번에 나는 한국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베토벤의 변주곡을 연주하고, 브람스·슈만의 사랑에 관한 노래를 첼로로 바꿔 연주할 예정이다. 가곡을 첼로로 연주하기 위해 내가 직접 편곡 작업을 했다.”
Q : 그리고 올해 사망 50주기인 쇼스타코비치의 소나타를 연주한다. 당신의 소련 수감 생활을 떠올리는 청중이 많을 것 같다. 소련에 체포돼 수감됐던 1970년 말이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스탈린 정권의 감시로 공포 속에 살았다.
A : “당시 나는 감옥에서 4개월을 보내고 나머지 14개월은 시멘트를 나르며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공산주의 건설에 일조했다고 농담하곤 한다.(웃음) 그때 2년 동안 첼로를 못 만졌지만, 마치 삶의 20년어치 경험을 얻은 것 같다고 느꼈다. 쇼스타코비치 또한 어두운 시절을 보냈다. 내가 매우 친밀하게 느끼는 작곡가다.”
Q : 매우 낭만적이고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첼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A : “평범하게 연주하면 청중은 음악의 50%도 듣지 못한다. 그들이 최소한 80~90%의 감동을 얻으려면 연주자는 120%를 제공해야 한다. 100%를 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나의 연주에 대해 ‘너무 과장한다’고 비판도 한다. 나는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전문가를 위해 연주하지 않고, 일반 청중을 위해 한다. 그들을 위해서는 과장해야 한다.”
Q : 재활 끝에 재기한 후의 활동은 어떻게 달라질 것 같나. 연주 횟수를 줄이려는 노력 등이 필요할까?
A : “1월 스위스에서 재기하고 2주 후 베를린·뮌헨·런던에서 공연했다. 이제 파리에서 공연하고 그 이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간다. 솔직히 아직은 드보르자크나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 같은 대곡을 완전히 연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나는 이렇게 인터뷰에서 늘 솔직해서 문제다!(웃음)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곡들을 사랑을 다해 연주해 가며 다시 완전히 회복해 보려 한다.”
마이스키는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속담을 전했다. “운이 좋으면 100세까지 살지만, 똑똑하다면 100세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게 된다”는 말이었다. 마이스키는 “평생 음악을 했지만 지금도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는다”고 했다. 오랜 경력과 큰 명성을 쌓았지만 제자를 기르지 않는 이유라고도 덧붙였다. 마이스키와 딸 릴리의 한국 공연은 6월 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대구(5월 31일)와 강릉(6월 1일)에서도 같은 공연을 한다.
☞미샤 마이스키=1948년생. 라트비아 리가 태생. 소련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18세에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6위에 입상했다. 소련은 그의 망명을 우려해 강제노동수용소에 18개월을 감금했다. 이후 이스라엘로 망명한 그는 유럽의 주요 무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함께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두 번의 결혼으로 자녀 6명을 얻었는데 그중 릴리·막심(피아노), 사샤(바이올린)가 음악가로 성장했다. 마이스키는 6명의 자녀에게 헌정하는 앨범을 하나씩 발매했다.
김호정([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