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한국 개미와 미국 베짱이

문제는 조약 14조. “대조선국 군주가 어떤 혜택이나 금전적 이익을 다른 나라 혹은 그 나라 상인에게 베풀면 이를 미국 관리와 백성이 일체 균점하도록 승인한다.” 최혜국 대우(MFN, most favoured nation treatment) 조항이 미국과의 첫 조약에 들어간 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 시대를 열었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의 기본 원칙인 최혜국 대우는 특정 국가에만 특혜를 주지 않는 내용이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주도권을 잡은 러시아가 삼림 벌채권과 광산 채굴권 등을 가져가자 미국과 비슷한 통상조약을 조선과 맺은 서구 열강은 MFN 조항에 의거, 경쟁적으로 이권을 챙겼다. 무역을 모르고 능력도 없던 조선 입장에선 불평등한 통상조약이었다. 그 첫 단추를 미국이 열었다.
미, 143년 전 첫 불평등조약 악연
금융개방 땐 “각목으로 다스려야”
이러다 개미마을 빈집 될까 걱정
금융개방 땐 “각목으로 다스려야”
이러다 개미마을 빈집 될까 걱정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은 1960년대 국제기구가 개도국에 권장하던 수입대체 발전 전략이 아니라 수출 드라이브 전략을 선택했다. 덕분에 전후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 시대의 모범생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상품무역에서 먹고살 만해지니 서비스 개방 압력이 밀어닥쳤다. 1990년대 초반 미국과의 금융시장 개방 협상은 험난했다. 1992년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사람들은 각목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미국 통상관리의 발언을 인용 보도했다. 당시 재무부 국제금융국장으로 미국과 협상했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회의 때마다 미국 측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주었다. 우리도 풀기 어려운 금리자유화나 자본거래자유화를 요구할 때는 무력감과 함께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2012년 발효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이다. “버거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 국민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만큼 변화에 적응력이 높았다.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국민의 역량에 대한 믿음, 그것이 FTA를 결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노무현의 어록은 아직도 울림이 있다. 2007년 원협정을 타결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2008년 쇠고기 추가 협상과 2010년 재협상을 해야 했고, 2011년 비준 과정에서 국회에 해머와 전기톱이 등장하고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홍역까지 치렀다.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또 재협상했다.
그런 한·미 FTA가 트럼프 2기에서 무력화 위기에 몰렸다. 한국 사회가 치러야 했던 한·미 FTA의 값비싼 비용을 떠올리면 미국의 FTA 무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대국 국민의 마음을 얻는 공공외교 측면에서도 트럼프의 미국은 빵점이다. 캐나다처럼 반미 감정을 부채질할 수 있다. 이미 FTA 협상을 거듭하며 통상 협정의 기본인 이익의 균형은 조금씩 무너졌다. 그래도 흑자 기조가 유지된 건, 노무현 어록처럼 적응력이 뛰어난 우리 국민의 역량 덕분이다. 한국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했고 허리띠를 졸라맸으며 소비보다 저축을 많이 해 외환보유액을 쌓았다. 미국은 베짱이처럼 과잉소비를 하니 무역적자가 난다.
이솝우화의 베짱이는 굶어죽거나 개미의 측은지심에 기대 생존하지만 현실의 베짱이는 관세를 흔들며 개미에게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일하며 먹거리를 쌓으라고 겁박한다. 베짱이 동네로 개미가 실제 이사를 갈지, 베짱이가 개미처럼 일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베짱이 동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조짐도 있다. 적어도 개미가 과로사하거나, 개미가 떠나 마을이 빈집이 되는 비극으로 이솝우화의 새 버전이 나오는 일은 없어야겠다.
서경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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