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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해석은 자유지만, 강요는 폭력이다

정윤재 사회부 기자

정윤재 사회부 기자

LA 다저스가 백악관을 방문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념해 대통령의 초청을 수락했다. 현직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유만으로, 이 전통적인 행사는 논란의 중심이 됐다. 일부 팬은 “라틴계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며 분노했고, 지난달 25일 백악관 청원홈페이지 Change.org에는 “방문을 철회하라”는 청원이 개설됐다.
 
내용은 “우리 연고팀이 포용과 다양성을 버리고 정치적 세력과 손잡았다”는 주장이다. 또 “다저스는 단순한 야구팀이 아니다. 이 도시에 뿌리내린 역사와 커뮤니티의 상징”이라는 메시지도 줄을 이었다. 청원에는 8일 기준 2000명이 넘게 서명했고, 서명자는 실명으로 “(다저스가)부끄럽다”, “이것은 LA의 가치가 아니다”라며 항의하고 있다.
 
이런 반응은 다저스가 가진 상징성, 지역성과 관련이 깊다. LA 대표 스포츠팀인 다저스의 팬층 상당수는 라틴계와 유색인종이다. 이들은 다저스를 ‘우리 팀’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이번 백악관 방문이 ‘단순한 일정’이 아닌 ‘정치적 행위’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팀은 연고지의 팬심을 외면할 순 없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나 보면, 고개가 갸웃 거려진다. 백악관 방문이 언제부터 특정 정권에 대한 ‘지지 선언’이 됐는가.
 
백악관 초청은 우승 팀의 상징적 순간으로 여겨졌다. 오바마 시절에도, 바이든 시절에도, 대부분의 챔피언 팀은 초청을 수락했고, 선수들은 웃으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번에는 달랐다. ‘트럼프’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맥락이 삭제되고 정치적 선과 악의 프레임이 씌워진다. 팀이 한 명의 선수도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발표하자, “모두가 공모자”라는 식의 낙인이 등장했다. 무키 베츠 선수는 “정치적 이유가 아닌, 팀에 대한 연대”라며 해명했지만, 그조차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피하지 못했다.
 
스포츠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선택이든 정치적 의미로만 해석하고, 다른 해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건강하지 않다. 모든 행동에 정치적 상징성을 덧씌우는 건, 표현의 자유라기보다 정치적 해석의 독점에 가깝다.
 
특히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비난의 주체들이 평소 ‘다양성’과 ‘포용’을 가장 강하게 외치는 진영이라는 사실이다.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자신이 정의한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난 선택은 인정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태도다.  
 
이런 흐름은 스포츠를 넘어 기업과 개인 소비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테슬라다.
 
전기차의 상징으로 불리던 테슬라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행보를 이어가는 일론 머스크 CEO의 발언 이후, 일부 극좌 진영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 여파로 지난달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테슬라 매장을 겨냥한 공격이 잇따랐다.  
 
17일 샌디에이고의 한 매장 외벽에는 나치 문양의 낙서가 그려지고 유리창이 파손됐으며 18일 라스베이거스 서비스 센터에서는 차량 5대가 방화로 전소됐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머스크가 트럼프와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테슬라 자체가 정치적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정치적 해석이, 폭력의 정당화 논리로 작용한다.
 
불매운동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단지 테슬라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차량에 불을 지르고 총을 쏘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이자 위협이다. 이 때문에 FBI는 “정치적 테러의 초기 단계”라며 특별 수사에 착수했다.
 
우리 모두 자문해야 할 질문이 있다. 모든 행동은 정치적 의미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 해석이 언제나 정당한가. 우리가 말하는 ‘다양성’이란 과연, 서로 다른 선택을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를 말하는가.
 
다저스가 백악관을 방문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승했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사랑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능과 기술력 때문이다.
 
누구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해석은 자유다. 그러나 해석의 자유가 누군가의 선택을 억압하고, 비난하며, 공격까지 정당화한다면 그건 더 이상 다양성이 아니다.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다양성은 말뿐인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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