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마음 읽기] 믿음을 잃었는가

철학은 왜 공부할까?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잔가지를 떨어내고 중심을 향해 가다 보면 철학은 ‘존재’를 묻는 데까지 이른다. 2년여 전 하이데거를 읽을 때 가장 어려운 건 ‘존재’ 개념이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창조주이자 만유의 주재자인 신에 대한 관념을 형성했다. 자라면서는 신에게 저항했음에도 존재자의 바탕이 되는 존재는 계속 ‘신’으로 상상되었다. 주변의 지적에 따르면, 이것은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인이 된 자녀들에게 생기는 폐해였다.
철학과 종교는 삶 반성하는 틀
확신 해체, 자신 낮추는 데 도움
삶을 삶 자체로부터 인식해야
확신 해체, 자신 낮추는 데 도움
삶을 삶 자체로부터 인식해야

무신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인도 아닌 나는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바뀌자 내가 모호함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기보다 지적으로 불성실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빠져나온 자는 멈추고 거기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치열했던 저항은 곧 안락한 무사유가 된다. 그러니 불신자는 신자보다 더 철저히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본질상 무신론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생각 없는 자본주의자가 되기 쉽다. “양질의 무신론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니스 터너의 지적처럼 무신론자들은 신앙인의 신념 체계를 세밀히 들여다보지 않기에 많은 경우 비판할 자격이 없다. 더욱이 요즘은 무신론자들이 잡신을 믿는 추세가 더 강하고, 그것의 대부분은 물질적 욕망에 밀착해 있다.
이럴 때 철학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이성뿐 아니라 몸과 감정에 대해서도 다시 사고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종교로의 귀의와는 상관없으며, 다만 이글턴이 강조하듯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때로 이성은 합리성과는 무관한 것들을 인정할 때라야 더 견고해진다.
철학과 종교는 비슷한 면이 많다. 우리 대부분은 경험에 의거해 직관대로 살아간다. 또한 직관을 멈추고 분석과 추론으로 경험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 일은 종종 반성적이며 고통을 수반하는데 철학과 종교는 그 과정에서 틀이 되어준다. 게다가 철학은 ‘확신’의 모양새를 취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이 시대를 주도할 때 철학자들은 늘 균열을 내는 역할을 자처했다. 니체는 사람을 미치도록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라 했고, 아도르노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해체하는 게 철학 본연의 임무라고 말했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확신하기보다 믿기로 결심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육신일 때 인간은 세계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는 경향이 높다. 지식을 쌓아 대적하기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사심을 품지 않는 존재 방식을 고민한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이성이 또렷함으로 차오를 때 서서히 신앙과 헌신도 결심하는 것이다.
철학과 종교는 둘 다 미래를 상정하면서 현재를 결단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염려하고 보살필지 알아차린다. 종교인들도 칼날 위에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돌아보고 가다듬겠지만, 철학자 김영민이 평생 수행자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 철학자 김상봉이 진보적 사유와 ‘영성’의 관계를 재점검하는 것 역시 철학과 종교가 밀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 것이다.
물론 여전히 종교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탐구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은 자아, 너무 적은 타자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럴 때 아마 철학이 종교에 반성의 계기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이 세상 너머 신의 공간은 잠시 접어두고 삶을 삶 자체에서부터 인식하려는 시도는, 비록 신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적이지도 않다. 이런 태도가 종교를 구하든, 철학을 구하든, 자신을 구하든 할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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