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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몸 몸 몸

지난 2월 한 달 동안 내가 맡은 환자가 4명이나 죽어 나갔다. 유난히도 추웠던 2월이었고 출근길은 날마다 전쟁이었다. 눈이 쌓였거나 얼음 빙판이거나 시베리아 바람이 볼을 후벼대는 검푸른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전사 같았다. 그 중 딱 한 번 온화한 날이 있어 오히려 안도와 불안에 떨면서 출근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2월은 회색이다’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2월은 회색의 기억이 있다.  
 
 
중환자실에서만 33년째 근무를 해오고 있어 아마도 나만큼 죽어가는 환자를 많이 경험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장의사도 이미 죽어 경직된 시신을 다룰 뿐 나처럼 죽어가고 있는 환자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의 표정, 신체의 각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시시각각 살피며 지켜보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일단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면 진통제, 가래 줄이는 약과 진정제를 투여해서 환자를 편안한 상태로 유도한다. 환자가 편안해 보이면 지켜보는 가족도 편안해진다. 환자가 죽어갈 때 그들의 모습과 표정에도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이제 다 놓고 받아들이는 듯 잔잔한 미소를 띠고, 어떤 이는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억울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나면 그때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진다. 더 이상의 움직임이나 변화는 없다. 의사는 사망선고를 한다. 보통 2~3시간의 grieving time(슬퍼할 시간)을 준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장의사에게 연락하라고 알려주고 시신은 비닐백에 넣어 냉동 시체 보관실로 옮긴다. 이제 거주할 육신을 잃은 혼은 어디로 가나? 이때 개인의 종교나 믿음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간다고 믿고, 불교에서는 업보에 따른 윤회설을 믿는다. 평소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 세계로 갈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증명된 사실이 아니고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믿음으로써 내 마음에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조상숭배도 하나의 신앙으로 중국의 유교, 일본의 신도, 한국의 선교, 인도의 힌두교는 죽어서 영혼이 조상의 세계로 찾아간다고 믿는다.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장석주, 이 책은 내가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나는 이 문장을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읽은 책이 나의 우주다’라고 수정하고 싶다. 살면서 우리 내면에 축적된 경험의 깊이, 그 밑에 흐르는 무의식의 거울이 우리 몸을 통해 빛을 낸다. 한때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된 많은 서적을 구매해 읽었다. 그 결과 ‘잘 죽는 법’이라는 졸저를 출간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사람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적으로 분류해 차별해 왔었다. 다시 말하면 몸을 쓰는 사람과 머리를 쓰는 사람으로 분류해서 대인관계를 맺고 지내왔었다.  
 
나는 이제 겨우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 살아갈 날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아질수록 삶 자체가 실존임을 실감한다. 삶을 체험하는 몸 자체가 실존이다. 탄생해서 죽을 때까지 육신을 입고 겪는 일만이 삶이고 실존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게 정신세계를 연구하는 철학자 중에서 니체의 ‘몸은 형태의 형태이자 영혼의 형태이다.’ 이 묘사는 과연 혁명적인 선언이다. ‘영혼, 정신, 몸 중에서 몸이 가장 앞선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신을 제 도구로 쓴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반란인가. 평생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고 살아온 나에게 니체의 이 사상은 큰 충격이었다. 평생 수천수만 명의 죽음을 목격해 온 나는 이제 몸, 몸만을 믿게 되었다. 사람은 평생의 경험이 몸을 통해 표출된다. 몸은 나의 존재를 표현하는 현상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총에 맞아 죽은 정대의 혼이 주위를 맴돌다가 화장당한 후 소멸하였다고 묘사한다. 우리는 죽은 자의 혼이 어디로 가는지 증명할 수 없고 추측만 할 뿐이다. 기도와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가족과 친구들의 마지막 예우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런 의식을 치름으로써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평안을 얻지만 죽은 자는 고요하다.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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