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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제 욕심낸 ‘협상의 기술’ 안판석 감독…'극사실주의' 연출의 비결은

안판석 감독은 "잘 만든 드라마는 시대와 현실이 반영된 문학 작품과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연출한 드라마는 '극사실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포토

아파트 앞에서 딸기 트럭 장사를 하는 엄마(길해연)를 찾아온 민정(안현호)은 ‘딸기 떨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는 “떨이가 왜? 있는 사람들이 더 싼 것만 찾아”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민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올해 마지막 딸기’로 문구를 바꿔놓고 자리를 떠난다. 이후 딸기 트럭에는 “올해 딸기 별로 못 먹었는데”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몰려든다.
딸기 트럭에 적힌 문구. '딸기 떨이'라는 문구엔 반응 없던 손님들이 '올해 마지막'이란 문구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진 JTBC '협상의 기술'

지난 16일 시청률 7.1%(닐슨코리아 전국)를 돌파한 ‘협상의 기술’의 4화 도입부 장면이다. 약 2분 30초가량의 이 짧은 장면은 실제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인 듯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연출자 안판석 감독(64)은 일상 속에서도 협상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드라마의 기획 의도,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 공감을 이끌어야 한다는 연출 철학 등을 한 장면에 압축해 보여줬다.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JTBC 사옥에서 만난 안 감독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딸이 바꾼 문구를 카메라에 바로 담지 않고, 몰려든 손님들 사이로 딱 드러나도록 연출했습니다. 그래야 궁금하고 재밌잖아요.” 그랬다. 안 감독은 38년째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협상을 거듭해 온 ‘협상의 기술자’였다. 드라마는 배우 캐스팅부터 편집까지 시청자에게 어떤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협상이 반복된다. 그렇게 그는 JTBC ‘밀회’·‘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MBC ‘하얀거탑’·‘봄밤’, SBS ‘풍문으로 들었소’, tvN ‘졸업’ 등을 연출했다.
안판석 감독에게는 길해연, 장현성, 오만석 등의 '안판석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이 있다. 2013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배우를 잘 파악할 수록 연출에 유리하다"며 "익숙한 배우 반, 새로운 배우 반으로 캐스팅을 꾸리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박종근 기자

M&A(기업의 매수·합병) 세계를 파고든 ‘협상의 기술’은 엘리트 의사 이야기를 다룬 ‘하얀거탑’과 결이 비슷하다. 주인공의 러브스토리 없이 한 집단에서의 교묘한 암투로 극을 끌어간다. 영화 시나리오 각색 경력이 있는 이승영 작가의 입봉작이다. 안 감독은 “처음 대본을 쓰면 어설픈 것들이 보이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만나보니 이 작가 숫자 감각이 뛰어나더라”고 칭찬했다.

주인공은 ‘백사’라 불리는 전설의 협상가 윤주노. 배우 이제훈이 연기한 백발의 피부 미남 윤주노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의 소유자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다소 불친절한 태도에 ‘냉혈한’, ‘사이코패스’라는 소문이 났다.

안 감독은 “드라마 조언을 해준 M&A 전문가가 백발이라서 언제 머리가 그렇게 됐느냐 물으니 30대 초반에 그랬다더라.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싶었다. 동시에 회장부터 신입까지 다 만나는 직업의 특성상 백발로 나이 숨기며 돌아다니기 딱 좋을 것 같아, 이제훈에게 백발 분장을 권했다”고 말했다. 또 “이제훈이 주식 투자에 관심이 많고 똑똑한 것이 윤주노와 닮았다”고 덧붙였다.
JTBC '협상의 기술에 출연하는 배우 성동일(왼쪽부터)과 안판석 감독, 배우 이제훈. '협상의 기술'은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대기업의 M&A 전문가와 그 팀의 활약상을 그린다. 사진 뉴스1

윤주노를 고용한 산인그룹 회장 송재식 역의 성동일에게는 연기에 자유를 줬다. 성동일은 실제 친분이 있는 모 회장의 행동과 말투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한다. 안 감독은 “대기업을 일군 60대 회장이라고 하면 노인을 생각하는데 요즘 60대면 굉장히 젊다. 회사에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 누구라도 편을 들어주려는 그런 알 수 없는 태도에서 연륜이 느껴질 뿐”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에 발을 붙인 두 메인 캐릭터가 만들어지자, 안 감독은 연출에 속도를 냈다. “머릿속에 잡히는 편집점을 따라 재미있게 촬영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재밌는 이 드라마를 빨리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가슴을 치며 기다렸다”고 했다. 좋은 스토리, 재미있는 캐릭터를 갖추니 “이건 한 시즌으론 아쉽다. 후반부의 긴박감을 더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 감독의 연출 참고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40대에 이 책을 깊게 파고든 그는 “인간은 보편적 감정을 느낀다. 시대와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는 한 편의 문학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하얀거탑’을 만들었다. 안 감독 특유의 ‘극사실주의 연출’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모든 드라마는 사실에 입각해 연출해야 한다. 비현실적인 스토리라도 정말 디테일하게 풀어놓으면, 역설적이게도 리얼리즘에 빨려 들어간다”고 했다. 이어 “모든 드라마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면서 저마다 ‘착하게 살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건 드라마가 우리네 삶을 반영한 문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문학이 가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사실적 연출을 위해선 ‘안판석 사단’이라 불리는 장현성·김학선·오만석·허정도·길해연 등 배우들의 역할도 컸다. 안 감독은 이들에 대해 “극에 달라붙어 연기한다”며 신뢰했다. “2~3년에 한 번씩 여는 오디션에서 별 다섯개를 받아 캐스팅했다”는 신예 안현호, 차강윤에 대한 기대감도 내비쳤다.
JTBC '협상의 기술' 출연진과 안판석 감독. 왼쪽부터 오만석, 성동일, 안판석 감독, 이제훈, 김대명, 안현호, 장현성, 차강윤.사진 SLL

60세가 넘어 ‘졸업’에 이어 ‘협상의 기술’을 꺼낸 안 감독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연출의 본질을 이해했다.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에게 ‘나도 제대로 좀 살아보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끔, 그런 생각이 꽤 오래 남을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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