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년전 테스형이 이렇게 말했다 "팬덤 정치가 세상 망친다"
[박상훈 ‘고전으로 읽는 민주주의’] 플라톤의 『국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부분). 가운데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이 플라톤이고 왼편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중앙포토]](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3/22/f3e4abf4-2bfc-4d0f-bdb9-65bbac3bf41a.jpg)
책은 하룻밤의 대화다. 시점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전성기다. 주인공은 소크라테스다. 대표적인 민주파 도시에서 열린 축제를 보고 아테네로 돌아가려는 그를 젊은이들이 막아서며 대화를 청한다. 결정은 다수의 의사, 즉 민주적 방식으로 내려진다. 대화의 무대는 어느 부자 노인의 집이다.
대중이 왜 양극단화에 빠지는지 분석
첫 대화자는 주인인 케팔로스 옹이다. 그는 빚지지 않는 삶, 남에게 구차해지지 않고 정직할 수 있는 삶이 올바르다고 말한다. 육체의 욕구에서 벗어나 좋고, 신에게 봉헌하고 구원을 청할 수 있어서 생활이 경건하다 한다. 그렇게 나이가 드니 교양 있는 대화보다 즐거운 일이 없단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노년의 삶 같은데, 그런 그를 플라톤은 대화의 장에서 물러나게 한다. 당신이 누리고 있는 지금 삶은 당신의 성품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부에서 온 것 아닐까. 진정 올바르고 정의롭고 가난한 노인에게 당신처럼 살라고 할 수 있을까. 평생 유복함을 즐기다 나이 들어 구원받으려는 삶을 올바르다 할 수 있을까. 저자인 플라톤은 첫 대화부터 ‘강남 좌파’ 케팔로스와 가난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대비시킨다.
두 번째 대화자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다. 그 역시 열성적 민주파로, 각자에게 맞게 갚아야 정의롭다고 말한다. 상대에게는 해롭게 갚고 우리 편에는 이롭게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민족 민주주의자다. 반민주, 반민족 세력을 척결해야 정의가 바로 선다고 여긴다.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무지의 자각’을 요청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정의롭고 상대는 불의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확신은 독단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정의는 보편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진영의 논리로 상대의 절멸과 우리 편의 승리를 정의 구현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양극화 정치에 대한 비판이다.
세 번째 대화자는 트라시마코스다. 그는 지식인이자 급진 민주파다. 그는 말한다. 법은 주권자의 명령이다. 참주정에서는 참주의 명령, 귀족정에서는 소수 엘리트의 합의가 법이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다. 주권자인 인민의 명령이 법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정의다. 오늘날로 보면 그는 인민주권론의 신봉자다. 무지의 문제를 무기로 삼는 소크라테스에게 면박을 준다.

불의하면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반박한다. 통치는 당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한 것이다. 공공선의 옹호가 치자(治者)의 의무다. 당신 말대로 하면 힘으로 지배하고 상대에게 불의해야 정의다. 양 떼를 보호하는 것이 양치기에게 올바른 일이다. 양치기가 자신의 유익을 좇아 양떼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듯 자신의 유익을 위한 통치를 올바르다 할 수 없다. 트리시마코스 역시 물러난다.
이어서 완전히 다른 대화자가 등장한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다. 그들은 철학자다. 그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올바른 것에서 유익함이 나온다고 하시니 이렇게 질문하겠다. 누군가 신비의 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하자. 그 반지를 끼면 다른 사람은 나를 못 보고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 반지를 올바른 사람에게 끼워준다고 하자. 말씀대로라면 올바른 사람은 올바르기에 반지를 끼고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 과연 그럴까

두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도 않는다. 이렇게 주장을 이어간다. 그렇게 합의한 정의는 힘을 가진 자, 즉 자유롭게 편익을 추구할 기회를 제한받게 된 자로서는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롭게 보이고자 하면서도 불의를 추구할 기회를 노린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게 유익하다면 그렇게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하는지를 보라. 아이들에게 착하게 보이라고 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익을 얻는 길이라 가르친다. 그런데 누군가 불의를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참지 말고 나서라 가르칠까. 괜히 그러다 너만 손해니 지나치라 하지 않을까. 최선은 지혜롭게 편익을 추구하며 들키지 않는 것, 불의하되 정의롭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현실주의적 정의론 아니겠는가.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를 데려와 치자의 역할을 맡길 수 없다면 현실적으로 이런 정의론이 최선 아니겠는가.
시민은 자유롭되 절제하는 삶 살아야
『국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20년 가까이 지난 BC 380~370년 사이에 나온 책. 스승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제자 플라톤의 재심 청구서 같은 책이다. 원제는 폴리테이아(politeia)다. 이 책을 통해 플라톤은 폴리테이아를 올바른 사람이 통치하는 올바른 체제로 정의하고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그에 맞는 정치교육론을 펼쳤다.
시민은 자유롭되 사치보다 절제를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 치자에게는 권력을 갖게 하되 그 가족이나 재산에 대한 권리는 가혹할 정도로 제한하는 반면, 시민에게는 권리를 갖게 하되 권력에 대한 야심은 갖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균형이 무너졌다. 모든 권력을 시민에게 주겠다는 팬덤 정치가가 일을 망쳤다. 그들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참주가 되려 했다. 그들은 더 많은 소비와 성장, 감세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대중은 폭식과 후회, 다이어트를 반복하는 사람처럼 열광과 냉소를 반복했다. 바른 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핍박했다.
그래도 올바른 정치에 대한 소명을 버릴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의를 추구하는 정치여야 한다. 팬덤과 여론을 동원하는 사악한 인간의 정치를 감수할 수는 없다. 올바른 사람이 정치하도록 권해야 한다. 당장은 핍박받아도 그의 선함은 끝내 존중받는다고 말해줘야 한다. 불의를 통해 유익을 얻고 돈과 권세로 행복과 구원을 얻으려는 삶보다 가난해도 정의로운 삶, 당파 대신 공동체를 위한 삶, 거기에 진정 가치 있는 정치적 삶이 있다.
이를 역설하다 떠난 사람, 그가 소크라테스다. 인류가 그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임을,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공동체를 바르게 이끌 진정한 정치가가 필요하다.
☞참주정=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통치자가 자의적으로 지배. 참주란 대중이 사랑한 독재자에 가깝다.
무지의 자각=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없기에 무지를 깨닫는 것으로, 독단에 빠지지 않고 진리에 대한 책임 있는 탐구가 시작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응축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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