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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호프]22연승 신화의 원년 최고 스타 박철순, 한국야구로 엇갈린 야구 인생

[사진]OSEN DB.

[사진]OSEN DB.


2027년이면 한국야구 명예의 전당이 들어설 야구박물관이 탄생할 전망이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야구박물관이 부산 기장군에 올 여름 착공 예정으로 2027년 개관할 전망이다. 박물관에 들어갈 소장품은 그동안 수집이 많이 돼 상태이고 그곳에 한 자리를 차지할 명예의 전당도 이제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센(OSEN)은 특별기획으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주인공이 될 레전드 스타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또한 한국야구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Hope)를 찾아갈 예정으로 일명‘KBO 호프를 찾아서’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한국프로야구 탄생과 함께 엇갈린 야구인생...최초의 한국인 메이저리거 기회가 날아가다....

박철순(69)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로, 1982년 원년 시즌에서 22연승을 기록하며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차례 부상을 겪으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야구 인생 역정을 들어보았습니다.(1편)

[사진]OSEN DB.

[사진]OSEN DB.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신지요.

▲이제는 모든 일에서 은퇴하고 주로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 수술했던 곳들(허리, 아킬레스건)이 정상이 아닙니다. 장마철 등 날씨가 궂으면 여지없이 통증이 찾아옵니다. 내 투구 폼이 하이키킹으로 몸에 무리가 많았죠. 수년 전부터는 이석증이 생겨서 일상 생활하는데 지장이 좀 있습니다.(2007년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현재는 완쾌된 상태이나 부인이 4년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 홀로 지내고 있다)

=선수시절 기억으로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인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에서 활동하다가 1982년 한국프로야구 탄생과 함께 국내로 유턴했습니다. 메이저리거가 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날린 것에 아쉬움은 없나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싱글A를 거쳐서 더블A에서 뛰고 있을 때라 조금만 기다리면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죠. 성적도 괜찮았고 구단 평가도 좋았습니다. 만약 6개월 뒤까지 메이저리그에 올려주지 않으면 계약이 해지돼 일본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계약조건이었습니다. 한국프로야구가 생기지 않았다면 내 야구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나도 궁금합니다.

[사진]OSEN DB.

[사진]OSEN DB.


=메이저리그에 가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는지요. 지금처럼 미국 스카우트가 한국을 찾던 시기도 아니었는데.

▲1979년 미국 볼티모어 오리올스 구장에서 열린 한미대학야구전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경기에 선발 출전해서 8이닝 동안 완벽하게 투구한 것이 미국 구단 스카우트들 눈에 띄었던거죠. 한마디로 제대로 긁힌 날이었습니다. 볼티모어 구단은 물론 밀워키 구단이 스카우트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귀국해서 학교(연세대 3학년)로 돌아오니 대한야구협회에 밀워키 구단이 정식으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학교로 전달돼 계약에 이르게 됐습니다. 일부에서는 한국 선수가 무슨 메이저리그 진출이냐고 조롱하는 등 연대에서 쇼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난 당시 공군을 제대했기에 병역문제도 없었고 학교에서 결정만 해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침내 1980년 밀워키 구단과 계약을 맺고 미국땅을 밟게 됐고 2년간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게 됐죠.

=당시 구위는 어느 정도였고 계약금 규모는.

▲미국에서 스피드건으로 측정했을 때 직구 최고 구속이 94마일(시속 151km)이었습니다. 구속보다는 볼끝이 좋고 컨트롤이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계약금은 기억도 안나는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만달러나 되나. 지금 중남미 선수들 몸값하고 비슷한 정도였습니다.

=미국 마이너리그 생활을 어땠습니까.

▲통역도 없이 혼자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꿈이 있었고 순조롭게 단계를 밟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밀워키 산하 캘리포니아에 있던 싱글A에서 시작해 텍사스 알파소에 있던 더블A에 올라갔습니다. 더블A에서 여러 구종을 익혔고 그 가운데 팜볼, SF볼(일명 반포크볼), 너클볼 등을 배워 잘 써먹었죠. 팀이 있던 알파소는 멕시코와의 국경지역으로 밀입국자들을 막기 위해 미국 국경수비대에서 밤이면 기관단총까지 쏘는 등 살벌한 곳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팀을 지역 우승으로 이끄는 등 구단에서는 저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미국에서 배운 것들이 국내 프로무대에서 도움이 많이 됐겠네요.

▲당연히 도움이 됐죠. 직구 구위는 그대로였고 컨트롤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마이너에서 배운 다양한 변화구(반포크볼,팜볼,너크볼 등)를 구사해서 경기를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 반포크볼은 팔꿈치에 무리가 있는 구종이라 가급적 피했고 종종 팜볼을 던지기도 했습니다.(팜볼은 손바닥 위쪽부터 공전체를 감싸는 구위로 직구처럼 가지만 구속이 좀 느리고 타자앞에서 뚝 떨어지는 구종으로 당시에는 체인지업 대신 구사했다고 한다. 박철순은 한국야구에서 팜볼을 처음으로 구사한 투수로 인정받고 있다) 너클볼은 포수 김경문(현 한화 이글스 감독)이 사인을 주면 가끔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주무기는 직구와 컨트롤이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불펜에서는 공이 별로였다가도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자신감이 차면서 구위가 좋아지는 실전형 스타일이었습니다. 그게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성공 요인이었죠.

[사진]OSEN DB.

[사진]OSEN DB.


=박 감독님 후배들인 최동원, 선동열도 메이저리그 구단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무산됐고 마침내 1993년 박찬호가 미국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투구 폼이 박 감독님과 비슷하다면 비슷했던 박찬호 선수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는데....

▲박찬호에게는 정말 나라에서 훈장을 줘야합니다. 박찬호 덕분에 한국야구의 위상이 올라갔고 후배들도 줄줄이 미국 진출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를 비롯해 최동원, 선동열이 먼저 갔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는데 박찬호가 대성공을 거둔 것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박선양 기자 [email protected]


박선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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