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의 세계는 첩보 전쟁] 살해 위험 속 임무 수행하는 공작원의 운명

지난해 정보사는 신분이 노출된 중국과 러시아 등지의 비밀 요원 수십 명을 급히 귀국시켰다. 언론은 ‘정보 역사상 초유의 사건’ ‘정보망의 궤멸적 타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8개월이 지나도록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 요원들에게 협조했던 현지 공작원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도 전혀 없다. 왜 그럴까.
한반도 준전시 때 피살된 최 영사
시신 온전히 확보 위해 비밀 작전
요원은 신분 드러나면 죽음 몰려
시신 온전히 확보 위해 비밀 작전
요원은 신분 드러나면 죽음 몰려
![1996년 10월 5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최덕근 영사의 유해.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3/12/137e59df-aae1-4381-9195-1fa2b524338f.jpg)
1996년 10월 1일 강릉 무장공비 사건으로 한반도에 준전시 상태가 보름 가까이 이어질 무렵 국정원 소속 최덕근 영사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괴한에 의해 피살됐다.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직감한 국정원은 최 영사의 시신을 최대한 빨리 서울로 운구할 것을 지령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시신의 완전한 보존이 쉽지 않은 실정이어서 부패가 진행되면 독극물 검출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확보한 최 영사 살해 독극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의 조문 모습.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3/12/a2cef527-cf58-47cb-ac0c-60963c98b584.jpg)
최 영사가 피살되던 날 오전에 함께 있었던 한 인사는 몇 년 전 ‘최 영사 추념 세미나’에서 필자에게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최 영사는 옆에서 보기에 지나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특히 연해주 일대에서 북한의 위조 슈퍼노트(100달러 지폐) 유통경로를 추적하는 데 밤낮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식당에서 내가 최 영사에게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손해를 봐도 미국이 보지 우리가 봅니까. 미국 영사관도 가만히 있는데 왜 영사님이 그렇게 애를 씁니까’라고 말했더니 최 영사는 ‘우리나라 돈이 아니고 미국 지폐라곤 하지만 북한이 위조한 슈퍼노트는 김정일 정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됩니다. 국가가 나를 여기로 보낼 때는 이런 일을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더는 할 말이 없어 ‘여기는 북한 벌목공도 많고 보위부에서도 많이 나와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알겠습니다’라며 살짝 웃더군요.”
죽어서 돌아온 대한민국 공작관의 유품에선 자필 메모지 한장이 발견됐다.
‘사나이가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다! 그것은 여한이 없는 일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스파이 세계에서는 최 영사처럼 강직한 인물보다는 변절한 사례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스파이가 배신하거나 정보를 유출하는 주요 동기를 ‘3W’로 설명한다. 와인(wine), 여성(woman), 돈(wealth)이다. 그러나 3W가 모든 스파이에게 먹히지는 않는다. 옛 소련의 드미트리 폴랴코프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전동 공구, 작업복, 낚시 장비, 산탄총 등 가벼운 선물만 받았다. 그것도 1년에 3000달러를 넘지 않았다. 술은 거의 안 마셨고 아내에게 충실한 가장이었다.
칼날 위에서 죽음과 춤추는 스파이
![체포된 러시아 요 원 드미트리 폴랴코프.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3/12/3f4bbec9-3569-43c7-a7a0-1879eb0343e1.jpg)
1986년 7월 드미트리의 25년 이중 스파이 활동이 그가 신뢰했던 FBI와 CIA의 배신자들에 의해 막을 내렸다. FBI의 로버트 한센은 KGB와 GRU로부터 140만 달러를, CIA의 올드리치 에임스는 270만 달러를 받고 드미트리를 팔았다. 1988년 3월 드미트리의 총살형이 집행됐다. 아버지와 같은 기관에 근무하던 아들은 자살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알면서도 가만두는 중국 정보기관
![러시아 당국이 배포한 최 영사 살해 용의자 모습.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5/03/12/10d77855-aa4e-44f1-85d5-2f950f55f70b.jpg)
정보사 A팀장은 현지 공작망 접촉을 위해 2017년 중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체포됐고 그때 포섭을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의 직간접 경험상 A팀장의 공작망은 실상은 중국의 방첩망이었고 중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A팀장을 포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0여 년 전 단기 연수를 갔던 국정원 요원의 신원을 파악하고 몇 년간 일언반구 없이 지켜봤던 중국이다. 14억 인구에 7억 대의 CCTV가 관찰하며 걸인들도 QR코드로 송금받는 세계 최첨단 디지털 사회가 중국이다. 최덕근 영사, 드미트리, 정보사 A팀장…. 누구는 ‘왕관의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이라고 추켜세우고 누구는 ‘조국의 배신자’라고 비난하지만, 스파이는 ‘칼날 위를 걸으면서 죽음과 춤을 추는 극단적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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