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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광의 세계는 첩보 전쟁] 살해 위험 속 임무 수행하는 공작원의 운명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비밀 요원들의 기밀을 유출한 정보사령부 A팀장이 지난 1월 법원에서 징역 20년에 벌금 12억원 등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정보 요원들의 생명에 명백한 위험이 발생했고 정보 수집을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더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을 중형 이유로 밝혔다.

지난해 정보사는 신분이 노출된 중국과 러시아 등지의 비밀 요원 수십 명을 급히 귀국시켰다. 언론은 ‘정보 역사상 초유의 사건’ ‘정보망의 궤멸적 타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8개월이 지나도록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 요원들에게 협조했던 현지 공작원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도 전혀 없다. 왜 그럴까.

한반도 준전시 때 피살된 최 영사
시신 온전히 확보 위해 비밀 작전
요원은 신분 드러나면 죽음 몰려

1996년 10월 5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최덕근 영사의 유해.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
해외 공작은 국익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서 법과 도덕의 경계를 넘나든다. 일반 행정부처는 언감생심 상상할 수 없는 정보기관 고유의 영역이다. 공작관은 칼날 위를 걷고 죽음과 춤을 춘다. 성공한 공작은 드러나지 않고 실패한 공작만 알려진다. 실패한 공작관은 죽어 귀환하거나 배신자가 되어 돌아온다.

1996년 10월 1일 강릉 무장공비 사건으로 한반도에 준전시 상태가 보름 가까이 이어질 무렵 국정원 소속 최덕근 영사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괴한에 의해 피살됐다.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직감한 국정원은 최 영사의 시신을 최대한 빨리 서울로 운구할 것을 지령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시신의 완전한 보존이 쉽지 않은 실정이어서 부패가 진행되면 독극물 검출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확보한 최 영사 살해 독극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의 조문 모습.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
국정원 요원들은 블라디보스토크는 물론 인근 도시의 호텔·식당·시장 등을 돌면서 구할 수 있는 얼음이란 얼음은 전부 확보했다. 최 영사의 관은 세 겹, 네 겹 비닐로 싼 얼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최 영사는 그렇게 10월 5일 서울로 운구되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최 영사의 시신에서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라는 독극물을 검출해냈다. 1995년 10월 부여에서 검거된 직파 간첩 김동식이 소지하고 있던 만년필형 독침용과 같은 성분이었다.

최 영사가 피살되던 날 오전에 함께 있었던 한 인사는 몇 년 전 ‘최 영사 추념 세미나’에서 필자에게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최 영사는 옆에서 보기에 지나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특히 연해주 일대에서 북한의 위조 슈퍼노트(100달러 지폐) 유통경로를 추적하는 데 밤낮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식당에서 내가 최 영사에게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손해를 봐도 미국이 보지 우리가 봅니까. 미국 영사관도 가만히 있는데 왜 영사님이 그렇게 애를 씁니까’라고 말했더니 최 영사는 ‘우리나라 돈이 아니고 미국 지폐라곤 하지만 북한이 위조한 슈퍼노트는 김정일 정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됩니다. 국가가 나를 여기로 보낼 때는 이런 일을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더는 할 말이 없어 ‘여기는 북한 벌목공도 많고 보위부에서도 많이 나와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알겠습니다’라며 살짝 웃더군요.”

죽어서 돌아온 대한민국 공작관의 유품에선 자필 메모지 한장이 발견됐다.

‘사나이가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죽는다! 그것은 여한이 없는 일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스파이 세계에서는 최 영사처럼 강직한 인물보다는 변절한 사례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스파이가 배신하거나 정보를 유출하는 주요 동기를 ‘3W’로 설명한다. 와인(wine), 여성(woman), 돈(wealth)이다. 그러나 3W가 모든 스파이에게 먹히지는 않는다. 옛 소련의 드미트리 폴랴코프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전동 공구, 작업복, 낚시 장비, 산탄총 등 가벼운 선물만 받았다. 그것도 1년에 3000달러를 넘지 않았다. 술은 거의 안 마셨고 아내에게 충실한 가장이었다.

칼날 위에서 죽음과 춤추는 스파이
 체포된 러시아 요 원 드미트리 폴랴코프.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
드미트리는 우리나라 방첩사령부와 정보사령부의 기능을 합쳐 놓은 옛 소련 총참모부 정보총국(GRU) 소장으로 냉전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운영하던 최고위급 이중 스파이였다. 1961년 드미트리가 미 연방수사국(FBI)을 통해 미국과 접촉하게 된 동기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어린 아들의 비극, 소련 체제에 대한 환멸, 핵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도덕적 신념이었다. 드미트리는 정치적 망명을 제안한 CIA 요원에게 “저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 미국에 가지 않을 겁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조국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인으로 태어났고 러시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1986년 7월 드미트리의 25년 이중 스파이 활동이 그가 신뢰했던 FBI와 CIA의 배신자들에 의해 막을 내렸다. FBI의 로버트 한센은 KGB와 GRU로부터 140만 달러를, CIA의 올드리치 에임스는 270만 달러를 받고 드미트리를 팔았다. 1988년 3월 드미트리의 총살형이 집행됐다. 아버지와 같은 기관에 근무하던 아들은 자살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알면서도 가만두는 중국 정보기관
러시아 당국이 배포한 최 영사 살해 용의자 모습. [중앙포토·사진 퍼블릭도메인·국가정보연구회]
삼십여 년 전 일이다. 중국에 블랙(비밀 요원)으로 나간 후배가 3년도 채 못 돼 서울로 소환됐다. 신분 노출 때문이었다. 4년 전 단기 어학연수를 갔을 때 이미 신분이 노출됐고, 중국 정보기관은 그때부터 쭉 후배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배는 살아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고 국내 부서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 역시 그즈음이었다. 우연한 계기에 동남아의 한 우방국 정보 요원을 만났다. 중국을 경유하는 탈북자들의 귀순이 잦던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필자가 “당신들은 중국에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순간 바로 체포되기 때문에 절대 직접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라고도 했다.

정보사 A팀장은 현지 공작망 접촉을 위해 2017년 중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체포됐고 그때 포섭을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의 직간접 경험상 A팀장의 공작망은 실상은 중국의 방첩망이었고 중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A팀장을 포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0여 년 전 단기 연수를 갔던 국정원 요원의 신원을 파악하고 몇 년간 일언반구 없이 지켜봤던 중국이다. 14억 인구에 7억 대의 CCTV가 관찰하며 걸인들도 QR코드로 송금받는 세계 최첨단 디지털 사회가 중국이다. 최덕근 영사, 드미트리, 정보사 A팀장…. 누구는 ‘왕관의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이라고 추켜세우고 누구는 ‘조국의 배신자’라고 비난하지만, 스파이는 ‘칼날 위를 걸으면서 죽음과 춤을 추는 극단적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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