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가 작가 한강에게 당신의 첫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물었을 때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추천했다.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고백하건대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난 후 일어난 사건들로 많이 보고 듣고 배워왔지만, 제주 4·3 사건은 왠지 멀고 아득한 역사 사건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3만 명의 주민이 무자비하게 희생당한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물론 이 사건이 궁금해서 구글에 검색해 보면 순식간에 필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문학에는 혼이 있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다시 한번 문학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끼고 작가의 섬세함과 예리한 필력에 고개 숙이게 된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참혹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한강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처럼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기쁨에 들떠있었지만 당장 정치나 이념보다 먹고 살아갈 방법만이 최대의 관심사이었던 때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최고에 달했고 정부 수립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는 마르크시즘, 스탈린주의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공산국가로 만들 셈이었다. 힘없는 우리 민족은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폭력과 공포만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그들이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사랑이었다.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그리고 보호해야 한다는 뜨거운 가슴이 없었다면 그들은 무너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그녀는 작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화자인 경하가 꾸었던 꿈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눈 내리는 벌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마치 묘비처럼 등성이까지 심겨있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며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운동화에 물이 밟혀 돌아보니 지평선인 줄 알았던 곳이 바다였다. 봉분 아래 뼈들이 쓸려가 버리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당황하면서 꿈에서 깬다. 경하는 이 꿈 이야기를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연출가이며 예전에 자신이 잡지사 근무 시절부터 동갑내기 친구였던 인선에게 말하자 인선은 그것을 프로젝트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약속한다. 어느 날 경하는 인선이 제주도에서 목공예 작업 중 손가락 절단 사고를 겪고 이를 접합하는 수술을 위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와 있는데 방문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는다. 병원에서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도에 있는 자기 집에 가서 자신이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는 앵무새를 돌봐달라고 간곡하게 다시 부탁한다. 예전에 한번 가본 기억을 더듬어 그날로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가지만 폭설로 인해 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막상 도착하니 앵무새는 이미 죽어있고 거기서 경하는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였던 인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인선은 그동안 4·3 사건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과 사진,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프로젝트를 위해 나무 목공예 작업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온 가족을 잃게 된 인선 어머니와 인선은 어느 날 강둑에 앉아 있는데 엄마가 인선의 뺨을, 뒷머리를, 어깨를, 등을 쓰다듬는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한강은 이 책을 ‘지극한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인선은 어머니의 삶이 자신에게 스며오는 것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사랑을 외면하지 못하고, 경하 또한 인선의 마음이 힘겨우면서도 내치지 못하는 그 사랑, 그 사랑에 밀려 기어이 고통을 택하는 것이 오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한강은 한국이 낳은 앙가주망의 대표 작가다. 메마르고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도 그녀를 통하면 가슴 시리고 섬세한 이미지와 시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문체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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