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우체국 해방일지

마야 정 / 수필가
우체국 직원 모집 공고가 났다. 분류직에 지원했다. 배달원들이 정확하고 신속하게 배달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라 했다. 경력이 쌓이면 창구 직원으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지만 발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미국은 카드 문화의 나라다. 떨어져 사는 많은 사람이 카드를 통해 인사를 나누며 살아간다 거기다 미국 땅은 또 얼마나 넓은가. 그 문화는 일찍이 어마어마한 량의 우편물을 만들어 냈다. 우체국에 편지와 카드만큼 많았던 것이 청구서와 지불수표(payment check)였다. 지불 마감 시간 때문에 우체국 직원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치다’라는 영어가 ‘going crazy’가 아니라 ‘going postal’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내가 합격할 즈음 바코드를 읽을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었다. 그로 인해 우체국은 엄청난 숫자의 직원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도 안 돼 그 획기적인 기계도 퇴물 위기에 놓이게 된다. ‘Paperless’, 종이가 사라지는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컬버시티의 게이트웨이 우체국에 발령이 났다. 합격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미국 공무원이 된 것이다. 철밥통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미국에서 내게 무슨 일이 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었다. 든든했다.
우편물이 주소지로 나가는 오전 10시에 맞추어 새벽 3시30분부터 분류가 시작되었다. 창구 뒤는 커다란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과 같았다. 기계에서 누락되는 우편물은 사람이 분류했다.
나는 기계 작동하는 곳에 배치되었다. 기계는 미국 사람 표준 키에 못 미치는 동양인에게는 꽤 높았다. 기계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상자에는 우편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거운 종이 다발 상자를 어깨 위까지 들어 빠른 속력으로 움직이는 기계 위에 얹어야 했다. 하루에 50번, 70번, 100번을 얹었다.
창구에서 본 미소는 거짓이었다. 막노동, 그 자체였다. 4년이 지나도 종이의 무게는 돌처럼 무겁기만 했다. 매일 어깨가 빠질 것 같았고 뻣뻣해진 목은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집안일은 물론 애들 키우기도 힘들었다. 창구까지 가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퇴근길 차에서 혼자 울 때도 많았다. 시험 준비기간까지 합해 5년이 넘는 세월을 ‘우체국’에서 보낸 셈이었다.
나의 수고, 나의 열정이 허무와 공허로 밀려왔다. 남은 인생을 꼭 여기서 이렇게 견디어야 하나. 다른 길은 없는가. 그렇다. 이곳은 미국이다. 기회의 나라가 아닌가. 내게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5년이면 충분하다. 나는 미련 없이 백기를 들었다. “여기서는 항복!”
그렇게 미국 생활 1막을 마무리했다. 다시, 뚜벅뚜벅 2막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마야 정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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