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Blessing)의 어원이 피흘림(Bleeding)인 까닭은…
헤르란 헤세의 ‘데미안’… 인간의 영원한 명제 ‘사랑과 신앙’
1968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해,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미수 사건으로 사회 곳곳은 전쟁의 불안감이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학교는 연일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데모와 휴강,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때 까지 오직 입시에만 매달려 로보트처럼 살아온 내게 대학생활이 주는 자유와 혼돈은 참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해부터 나의 지적(知的) 방황은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고교 3년 동안 인생문제를 놓고 학교 스승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전혀 없다. 오직 입시를 빙자한 과열된 과외와 모의고사 서열이 전부였다. 장래 진로 문제를 놓고 방황할 때도 학교 선생들은 별 도움이 못 되었다. 그래서 내겐 진정한 사제의 정이 없는 교육제도에 대한 불신이 내재해 있었다. 고 3 졸업 파티때, 무슨 노랜가를 부른 나를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네게 그런 재주도 있었냐고 되묻던 담임선생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학에 와서보니, 입시이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 경이로왔다. 그리고 내 삶을 내가 주관할 수 있는 자아(自我)가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때 읽은 책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싣달다」, 또 「나르시스와 골드문트」등이었다. 나는 점차 나를 얽매고 있던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데미안」을 읽으며,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적 안목을 키워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아 갔다.
데미안은 소년 싱클레어의 성장소설이다. 열살 소년이 자라면서 인생의 고비마다 만나는 조언자(mentor) 들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현학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동년배 친구지만, 삶에 대한 성숙하고 자유로운 안목을 가진 조언자이다. 데미안은 인간의 사고가 전통적 틀에 매이지 말고 보다 창조적이고 자유로와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두가지 명제를 던진다. 신앙과 사랑의 문제이다.
데미안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인간이 숭배하는 신(神)도 성스럽고 선하기만 한 전통적 기독교의 신의 개념을 넘어서 악의 속성까지 소유한 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랑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강렬한 인간 내면의 욕구인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로, 억제하고 타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인간속성임을 강조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권하는 대로 아브라삭스(Abraxas) 라는 신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고대 신화속에 나오는 선과 악의 속성을 함께 가진 신이다. 그리고 인간적 애욕을 초월하는 사랑의 상징으로 베아트리체라는 이상형을 그린다. 싱클레어는 그즈음 인생 최대의 조언자를 만난다. 곧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인데 그녀로부터 모든 인간애를 포용하는 사랑의 실체를 체험하게 된다. 마침내 청년이 된 싱클레어는 1차 대전에 참전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지적인 독립을 선언한다.
소설 데미안은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다. 그는 1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점점 독선적이고, 군국화 되어가는 조국 독일에 대한 실망과 함께, 그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관에서도 멀어진다. 1차 세계대전은 그 엄청난 사상자와 파괴력으로 인해 인류의 순진성(Innocence)을 앗아간 말기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 그는 소년 싱클레어의 눈을 통해 그가 심리적, 지적변화를 체험하며 점차 순진무구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리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지적(知的) 조언자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였다. 소설 데미안은 니체의 사상을 고스란이 담고 있다. 니체는 전통적 신앙이나 가치관을 단호히 거부하고 새 패러다임을 추구하였다. 그가 1886년 펴낸 ‘선과 악을 넘어서 (Beyond good and evil)’라는 책에서 선악만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데 기준이 됨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선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선과 진리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본다.
이 변화를 가져오는 힘, 그래서 사회을 변혁시키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가진 의지로 보았다. 그중에서도 권력에 이르려는 의지(will to power) 가 가장 강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니체는 이 세상은 창조적인 천재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지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만인평등과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리가 개인의 능력추구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혐오하였다. 그는 모든 독선주의(dogmatism)을 배격하고, 끊임없이 실험적이고, 분방한 개인의 자유정신을 신봉하였다.
에필로그: 인생의 조언자들과의 만남
당시 우리의 대학시절 지적 방황의 명제도 신앙과 사랑이었다. 나는 종로 5가에 있는 대학생 선교단체에 들어갔다. 철저한 성경공부와 전도생활이 주목적이었다. 방황하던 수백명 대학생들이 변화되어 뜨거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첫 신앙의 조언자로 L목자를 만났다.
그는 이 시대 하나님이 내신 지도자 같아 보였다. 그가 전하는 성경말씀은 그대로 살아 마음에 파고 들었다.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설득력이 있었다. 누구나 그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했고, 그 사랑안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얻었다. 그는 니체가 말하던 선택된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아이로니칼하게도 니체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도그마가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점점 그의 독선은 많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뺏고 맹종을 강요할 정도로 심해졌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도그마없는 권력 지향적인 엘리트가 과연 있을까? 그 점을 니체가 간과한 것이 아닐까고 나는 회의하였다.
내가 L목자에 실망해 있을 무렵, 또 한사람의 조언자를 만났다. A선배였다. 그는 지성과 감성이 어울어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불안정한 10대를 지내던 내게 그는 늘 용기를 주었다. 내가 회관을 떠날 결심을 하자, 새가 알을 깨고 날아가듯 성장의 기회로 삼으라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서로의 장래를 위해 축복기도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데미안과 싱글레어처럼 서로 20대가 되기 전에 헤어졌다.
30년만에 A선배를 다시 만났다. 그는 마치 옛 약속을 기억이라도 하듯 말을 꺼냈다. “축복(Blessing)의 어원이 피흘림(Bleeding)이란 말을 들었소. 내가 누리는 오늘의 축복은 결국 누군가의 피흘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이 나이 들면서 깨닫게 되었소. 이제 나 나름대로의 신앙과 사랑을 찾은 것을 참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찾은 신앙은 결코 헷세의 신, 아브라삭스가 아님을 단언할 수 있어요. 내가 아는 이 세상의 사랑도 니체의 수퍼맨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신앙과 사랑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희생과 피 흘림임을 고백할 수 있어요.”
나는 A선배의 말을 들으며, 그가 아직도 내 조언자로 남아 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랬다. 내 영적 방황이 아직도 끝나지 않을 것일까? 싱클레어는 나이들면서 조언자들로부터 홀로 서서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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