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개척자와 밀항자의 차이
이보영/전 한진해운 미주본부장
영어 'Pioneer(개척자)'는 프랑스 고어의 'Paonier(빠오니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Paonier'는 '길을 여는 사람'을 뜻한다. 미국 지도에 수많은 길(프리웨이)이 종횡으로 그어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Paonier'란 단어가 떠 오른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 온 청교도는 프런티어가 되었고 개척정신으로 신대륙에 건너 온 이민자들은 파이오니어가 됐다. 개척시대가 끝난 오늘의 우리는 아메리칸드림을 열어 가고 있다. 미국의 아이콘 '개척정신'이 오늘날에 와서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바뀌었다. 이 아메리칸 드림 때문에 밀항자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얼마 전 한국 국적 항공기를 통해 중국인 여성 3명이 밀입국한 사건이 큰 화제가 됐었다. 밀항자 3명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잉 747-400 대형 여객기에 몰래 탑승했고 그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경유해 LA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기체 뒷부분 좁은 승무원 휴게실의 천장에서 장장 20시간 넘게 숨어 있다가 비행기가 미국 땅에 도착하자 바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항공기 천장엔 복잡한 배선들과 보조선 장치가 있어 사이사이에 좁고 긴 공간들이 존재한다. 항공기 안전문제를 이유로 이들 공간에는 담당 정비사 외엔 누구도 들어 갈 수 없다. 밀항자들이 승무원 휴게실 천장을 은닉장소로 택한 것은 우선 기체 내부를 잘 알고 비행중 소음이나 진동이 기체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심해 밀항자들이 움직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전문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공항보안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밀입국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관계 당국은 이번 사건의 망명동기 잠입경위 루트별 보안검색 외국 항공기의 기체 내부구조 등에 대한 정밀조사와 향후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테러리스트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육지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은 곧바로 추방되거나 해당 국가의 대사관에 인계되지만 선박이나 항공편으로 들어 온 밀항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망명자라고 주장한다. 정치적 망명인 경우엔 진위가 판명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밀항자를 태운 항공사는 벌금은 물론이고 밀항자들의 사법 판결이 끝날 때까지 체류와 재판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호텔 음식 경비 병원 변호사 통역 차량 의류 일상소모품 등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전담 직원까지 배치해야 한다.
내가 해운사에 근무했던 시절에도 컨테이너 선박을 통해 중국인 밀항자들이 홍콩에서 롱비치항으로 밀입국한 사건들이 종종 발생했었다. 그들도 역시 체포와 동시에 정치적 망명을 주장했다. 사법절차가 끝날 때까지 회사는 밀항자를 운송했다는 이유로 벌금과 함께 이들에 대한 법률적 책임과 체류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부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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