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9] 멕시코 초기이민 농장생활
속아 간 멕시코 이민…채찍 맞아가며 '에네켄 노동'
1905년 4월2일 1033명의 한국인을 태운 영국배 한 척이 인천항을 떠났다.
엘 보트(El Boat)호로 알려진 이 배는 1천여 명의 승객을 태웠지만 여객선 아닌 화물선 이었다. 그래서 선실이라는 것이 없었다. 짐을 실었던 몇 개의 창고에 나뉘어져 사람들은 실렸다.
화물선에 1천여 명의 사람들이 탔으니 식사가 변변할 리도 없었다. 이런 항해는 한달 보름동안 계속됐다.
그 동안에 2명의 어린이가 죽었다. 선원들 풍습대로 바닷물에 던져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선원들은 다른 사람들의 심리적인 동요를 막기 위해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이 배가 도착한 곳은 멕시코의 살리나 쿠르스 항이었다. 그 배에 탔던 한국인들은 그곳이 바로 하와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아서 멕시코로 온 것이다. 1031명 이들이 멕시코로 건너간 한국의 이민들이다.
◇대한제국도 멕시코이민 몰라
멕시코의 이민은 불법이었다.
그들이 떠날 때 소지했던 여권은 일련 번호가 없었다. 필요한 몇 개의 도장도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 멕시코로 건너갔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정부(당시 대한제국)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무렵에 하와이로 떠나 그곳에서 살고 있던 초기이민들도 멕시코에 한국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어떤 사람(인삼장수 박영순)이 장사일 때문에 멕시코에 갔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한국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확인한 그는 이 소식을 미국의 한인단체에게 전달했다.
◇한인 인삼장수 확인으로 알려져
우상범 목사. 우 목사는 멕시코의 한인들을 위해 6년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해 왔다.
LA한인 연합장로교회에서 시무 했던 우상범 목사의 설명이다.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지방에 한국동포들이 많이 와서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소문이 들려서 그때 미국에 있는 국민회에서 황사영씨로 기억되는데 그분하고 또한 분을 실제 파견한 일이 있습니다. '인삼장수가 말한 사실 그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들이 멕시코에 와서 실제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다 조사해 가지고 돌아온 다음에 국민회에 보고함으로 인해서 이제 세계에 알려졌고 우리 나라 정부에서도 알게됐어요."
우상범 목사는 1967년 멕시코로 건너가 바로 그분들을 위해 그곳에서 6년동안 선교 활동을 했던 분이다.
멕시코로 건너간 초기 이민들은 '어저귀(에네켄)' 밭에서 일을했다. 한글 대사전에 어저귀는 아욱과에 속하는 1년초 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줄기와 껍질은 섬유로 쓰여진다고 돼있다.
그러나 멕시코의 어저귀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멕시코에서도 유카탄 지방에서 만 자라고 있는 이 식물은 용설란과 비슷하다. 멕시코 이민들이 노동을 했던 유카탄 반도의 원주민인 마야인들은 이 식물을 '병가'라고 부르고 있고 멕시코 인들은 '에네켄'이라고 말한다. 어저귀라고 우리 이민들이 이름을 붙였던 것은 섬유로 쓰여 진다는 공통점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어저귀는 '마닐라 삼'과 같이 마대나 선박의 로프를 만드는데 쓰여진다.
티우아나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선인장과에 속하는 식물인데 그 잎이 1미터50에서 2미터 가량 길고 넓이가 30-40센티 정도로 위를 향해서 쭉쭉 뻗어 있는데 그것을 잘라냅니다. 잘라낸 다음에 양편으로 톱니같이 붙어 있는 큰 가시를 때어내서 다듬어서 다발로 묶어서 구루마에 실어서 섬유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는데 바로 그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에네켄에 한을 묻은 한인들
멕시코 이민들의 서러움은 바로 이 에네켄에 있다.
에네켄에는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크기가 4-5 센티나 되는 가시가 있다. 유카탄 반도는 열대성 기후여서 웃옷을 입을 날씨가 아니다. 어저귀 잎을 한아름 묶어서 등에 짊어지고 나를 때면 그 가시에 찔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 참을 만 했다. 그 가시 때문에 눈이 먼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있다.
취재 당시(1977년) 73살 현오목 할머니의 얘기다.
"어저귀(애네켄)가 이렇게 잎사귀가 돋지 않았어요? 그 끝에는 가시가 이 만큼씩 합니다.그 가시에 찔려 눈 머신 어른도 있고 여긴 모두 가시풀이죠. 가죽 신발을 하고 갑바를 치고 그렇게 들어가야 어저귀를 겨우 따요. 풀을 쳐 준다해도. 그 어저귀밭에 나가서 우시는 어른도 많았대요. 숱하게 물에 빠져 죽으신 어른 병들어 죽으신 어른…."
하와이의 이민들은 아침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10시간 정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이민들은 새벽 4시부터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다.
당시 95살 김은순 할머니의 얘기다.
"진 종일 나가서 '도스 밀' 말이 그렇지 그게 적습니까? 도스 밀이면 그게 얼마예요. 몇 점(몇 시)에 나가는 줄 알아요? 새벽 3점에 나갑니다. 새벽 3점에 나가서 저녁 4점에 들어옵니다."
'도스 밀'이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2천이라는 숫자이다.
에네켄 잎을 따서 가시 없애기를 하루 2천 개씩 했다는 얘기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해도 2천 개를 하기는 어려웠다. 2천 개를 하지 못하면 채찍으로 때렸다. 하와이에서는 농장마다 달라서 채찍질을 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 1세들은 어느 농장이건 채찍질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어린이도 에네켄 따는 일해
하와이의 농장에서는 어린이들은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간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달랐다.
2세 동포 당시 72살 고순희 할머니의 회고다.
"우리는 오빠하고 같이 농장에 가서 어저귀를 따러 댕겼지요. 저는 어저귀를 훑고 오빠는 어저귀를 따고요. 그때 동생들은 어렸었어요. 그래 동생들이 크니깐 저는 안댕겼지요. 그 대신 동생들이 댕겼습니다."
멕시코로 떠난 이민들은 또 하나 언어의 장벽을 뚫지 못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는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통역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 멕시코인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서러워야만 했다.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이 나라 풍습도 모르고 말을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 시키는 사람이 무엇을 시키는지 잘 알 수가 없겠죠 당연히 일을 잘못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엉뚱한 일을 할 수도 있다고요. 시키는 일은 안하고 딴 일을 할 수가 있다고요.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있어서 미움을 받았고 또 매도 맞는 일도 있고…."
멕시코 이민들 중에는 너무도 괴로운 농장일이 싫어서 탈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어김없이 붙잡혀 왔다. 유카탄 반도는 우리 나라 전체보다도 더 넓은 곳이다. 그 곳은 황량하기만한 들 판이다. 가는 곳마다 선인장만 있을 뿐 버려진 땅이었다. 그 곳에서 찾아 나설 길이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멕시코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니 다시 붙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정리= 천문권 기자 [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