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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종호/OC본부장

# 남이(南怡·1441~1468) 장군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20대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 한 수 때문에 역모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라는 유명한 바로 그 시다.

'백두산의 돌은 장검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다 마르게 한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태평하게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라는 뜻이다. 그런데 간신 유자광이 '남아이십미평국'이란 구절을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으로 슬쩍 바꿔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해석해 남이를 모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이는 8대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임금으로부터 직접 국문을 받았다. 그 자리엔 이시애의 난 평정에 함께 활약했던 고령의 영의정 강순(康純, 1390~1468)도 있었다. 그런데 남이는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거짓자백을 하면서 영의정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결국 강순도 남이처럼 국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했으며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형장으로 끌려 가기 전 두 사람이 나눴다는 야사가 흥미롭다. 강순 왈, "이놈아, 죽으려거든 혼자 죽지 왜 죄 없는 나를 끌어들였느냐?" 남이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죄 없다는 것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그런데 일언반구 도와주지 않았으니 일국의 영상으로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 아니겠소. 그러니 살만큼 살고 누릴 만큼 누린 당신이 이제 나와 함께 간들 그리 나쁠 것은 없지 않겠소."

# 조선시대에도 요즘 청문회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역모나 반인륜적인 범죄 사건을 취조하기 위해 특별히 설치된 국청(鞫廳)이 그것이다. 국청에서 혐의를 추궁하기 위해 심문하는 것을 국문(鞫問)이라 했고 임금이 친히 하면 친국(親鞫)이라 했다. 국청이 차려지면 영의정과 좌·우의정, 판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승지 같은 조정 최고위직들이 모두 국문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의금부·사헌부·형조·포도청 등 당시 사법기관 수사 전문가들도 총동원되었다. 그다지 전문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국회의원들의 실속 없는 호통만 난무하는 요즘 청문회보다 오히려 더 전문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극에서도 흔히 보듯 국청은 혐의자가 이미 죄인임을 전제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절차였다는 것이 한계였다. 특히 당쟁이 극한으로 치닫던 때는 임금이나 세도가의 개인적인 원한이나 상대 당파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고문이 예사로 행해졌고 결과적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3족(본가·외가·처가)까지 죽임을 당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남이-강순의 국청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하지만 질문은 무뎠고 대답은 교활했다. 옛날 국청같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매우 쳐라"는 식의 지엄함이나 위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하나같이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죄를 부정하기 바빴다.

이렇게까지 죄목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만 하는 '죄인'들을 속수무책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착잡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은 사라지고 당리당략의 셈법만 난무하는 이런 식의 청문회라면 조선시대 국청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구나 청문회가 진실을 파헤치기는커녕 오히려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리로 악용되고 있는 것만 같아 더더욱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의 분노지수도 그래서 자꾸만 더 올라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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