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정 칼럼] 옛 친구들과 함께
작년 여름과 가을은 특별했다.어릴 때 같은 동네 살던 친구들을 시카고에서, 그리고 애틀랜타에서 만난 것이다. 소꿉친구들을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만나서 어릴 때의 추억을 나누고 또 그동안의 삶을 이야기하는 귀한 시간을 가진 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앨라배마에서 사는 내가 옥주를 만나러 시카고 여행을 했고, 가을에는 LA 사는 형옥이가 애틀랜타로 이사한 딸을 보러온 길에 영애와 나를 만났다. 애틀랜타 만남에 합류하지 못한 옥주와 뉴질랜드에 사는 정민이는 몸이 달아 전화만 해댔다. 나중에 우리의 만남을 알게 된 한국의 찬숙이와 학경이는 아쉬워하며 올 여름에는 모두 귀국해 서울 모임을 가져야 한다고 약속을 강요했다.
고무줄이나 공기놀이를 하며 웃고 몰려다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자식들이 결혼하기도 했고 결혼해야할 나이들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월은 빠르다.
어느 사이엔가 젊음은 떠나갔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것 같다며 우리는 파안대소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동안의 삶에 대해 -감추고 싶었고 젊었으면 할 수 없었던 지난 이야기들도 다 풀어 젖혔다.
초등학교 동창인 동네 친구들은 모두 한 인물 했다. 특히 LA 사는 형옥이와 서울에 사는 찬숙이는 영화배우를 능가하는 용모와 큰 키에 날씬한 몸매여서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고, 남자들이 언제나 줄을 서다시피 따라다녔다. 형옥이나 찬숙이와 함께 다니다가 우연히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보면 얼마나 이상하게 못생겼는지, 갑자기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질 정도로 두 친구는 걸출한 미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바보처럼 그녀들의 미모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예쁜 친구가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생각하면 이래저래 못났던 것인데, 어쩌면 용모를 비롯한 자신의 수준을 일찍 깨달아 겸손할 수 있었고(?) 그래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몇 십년지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된 일인지, 친구들이 말도 안 된다며 나의 겸손을 인정하지 않는 게 유감이기는 하지만.
영애네 집과 형옥의 딸네 집을 오가며 푼 이야기보따리는 함께 일주일을 지내도 끝날 줄 몰랐다. 웃고 눈물 흘리며, 듣기에도 바빠 나는 말 할 틈도 없었다. 시카고의 옥주와 애틀랜타의 영애에 이어 그토록 예뻤던 형옥이의 인생도 굽이굽이 많은 사연을 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친구들은 한국 엄마의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워, 모두 착하고 바르게 잘 컸다. 옥주의 아들들은 미국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고 형옥이의 아들은 LA와 한국을 오가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찬숙이의 딸은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의사가 되었다. 자식들 모두가 내로라 할만 했다. 서울 변두리 동네 뒷산을 뛰어다니던 철부지들의 아들, 딸들이 이 시대의 역군이 된 것이다. 드라마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그 우여곡절의 인생을 우리는 잘 살아냈다. 아직도 우리의 인생은 진행 중이고 얼마큼의 축복과 얼마큼의 위기가 남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중간 결산을 서로 칭찬과 격려로 마무리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되지는 못했지만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가정과 아이들을 지키고 잘 키워냈다. 이 정도면 칭찬 받을 만하지 않은가. 이 정도면 상 받을 만하지 않은가.
찬숙이와 학경이가 하도 끈질기게 이번 여름에는 한국에서 다 모여야 한다고 다그치는 바람에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우연히도 올 여름에는 영애만 빼고는 친구들 모두가 한국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시기가 조금씩 유동적이어서 같은 시기일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각자 서울의 친구들을 보고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을 다 함께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약속했다. 언제일지라도 모두 함께 만나기를. 그리고 우리가 살아낸 삶을 서로 칭찬하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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