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중앙신인문학상/수필 부문-당선작] 빈터

김화진

비석을 물로 씻어내린다. 동판 위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을 때 그이의 숨결이 손끝에 전해옴을 느낀다. 내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아주 섬세한 전율까지도 흡인한다. 남편과 내가 함께 쉴 자리로 마련된 곳은 집에서 불과 2마일 떨어진 성공회 묘지이다. 나누고 싶은 세상의 얘깃거리가 떠오르면 이곳을 찾는다. 아직 더 하고픈 말이 있는데 마주 보고 들어줄 그는 없다. 좋아하던 흰 데이지 들꽃 한 묶음으로 안부를 묻는다. 밑가지 잎을 훑어내고 꽃병에 꽂는다. 편히 누운 그들의 가슴 위치에 꽃병이 놓이는 것이라 한다. 내가 그에게 주는 꽃이지만 그가 품은 외로움 다발을 내가 건네받는 듯하여 가엾은 그리움이 스친다. 주변 묘지에 시들지 않은 꽃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이다.

머리맡에 이고 있는 비석의 오른편은 나의 빈자리로 남아있다. 어느 날 더 이상 그리움 때문에 별 사이를 방황하지 않아도 될 날에 채워질 공간이다.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숱한 만남의 시간 속에서 어떤 뒷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모여진 하루하루를 빈 종이에 얹어본다. 수 없이 다른 모양의 나날들, 채색된 삶의 조각들이 어우러져 창공을 수놓을 때 멀리멀리 수묵향기로 퍼지고 싶다.

남편은 아픔과 함께 삶을 지탱하면서 그가 떠난 후 남을 상황에 대비한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갖추어 놓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소유권 이양은 물론 아빠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할 내게도 아이들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라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생애의 마지막 가을 찬란한 햇살 스미든 어느 날 그는 스스로 영원히 쉴 터를 정하고 싶어했다. 내 가슴은 차마 이별이 다가올까 시려오는 듯 무거운데 묘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빈 자리들을 둘러보는 그의 침묵은 차라리 살얼음판이었다.

가파르지 않게 언덕진 곳. 남향으로 굽어보이는 산자락이 드넓은 천국의 평원처럼 해맑다. 머무는 햇살이 종일토록 따사롭다. 뒤편엔 토팽가캐년의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행여 외로움을 기대며 쉴 수 있을 듯하다. 낯선 영혼들 틈에서 우리가 겪어 온 이민자의 서러움을 다시 이겨내느라 애쓰는 건 아닐까.



촘촘히 자리한 비석들이 모두의 이름들로 가득하다. '사랑받았던 아빠, 엄마, 남편, 아내,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 , 어느 젊은이의 자리엔 '귀여운 내 아기'라는 구절도 있다. 각기 끝없는 메아리로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분지 만한 동판 위에 너울거린다.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 속에 있어요', '당신을 잊지 못해요'...



그는 나와 함께 묻히는 자리를 원했다. 세상에서 못다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 원함일까. 어딘가 모를 영원의 세계에서 달아와 잠시 이 지상에 머물다 회귀하는 삶이 아닌가. 함께 있던 시간이 행복했다. 서로 다른 모양의 마음을 짜 맞추느라 부딪히며 아파한 날도 많았다. 고달픔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도망쳐 사라지고픈 때도 있었다.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어 함께 지탱해온 긴 시간이 나를 휘감아 남은 내 삶을 끌어갈 쟁기가 될 것이다.

그이와의 33년 시간에 너무 익숙해 있음인가 문득 내 혼자됨에 놀라곤 한다. 각종 서류의 ' 미망인' 칸에 표시해야 할 때, 연말 남편 동문파티에 갈 수 없을 때, 동창모임에서 남편자랑에 맞장구칠 수 없을 때면 가슴 한켠이 시려온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란 것을 마음에 새기며 일상에 몸을 맡긴다. 외로움 한 자락씩 만이라도 거둘 수 있다면 가벼운 날갯짓으로 높은 창공을 날아보리라.

가을이 깊어가는지 국화가 만발이다. 해마다 11월이면 많은 기억이 나를 깨운다. 결혼을 했고 첫 딸도 11월에 낳았다. 사랑하는 엄마도 가을국화 향기와 함께 하늘로 떠나셨다.

모두가 풍요의 계절이라고 감사의 절기라며 마음 넉넉한 시절이 돌아오면 늘 내 가슴은 떠나버린 제비들이 남긴 처마끝 빈 둥지가 된다. 철새들은 새봄이면 다시 오리라 마는 세상 길을 헤매어도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이다.
좀 더 머물러 주지 그랬어. 나 혼자선 너무 힘드는데.

둘이 맞잡고 가야할 길을 홀로 걸어가는 일은 외롭다. 사람은 물론 모든 사물들은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가 정해져 있고 지켜야할 시간이 있음이다. 애당초 함께 계획한 삶의 설계도가 끝날에까지 어긋나서는 안 될 일이다. 한참 진행 중인 건축물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무너져버린 내 마음을 추스르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그가 남겨준 좋은 것들만을 안고 살아간다. 따뜻한 가슴을, 다정했던 그 손길에 묻어나는 체온을 더듬는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음이라며 불러주던 나훈아의 '사랑'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두 아이에게서 아빠 닮은 모습을 찾아본다. 손자에게도 외할아버지 사랑의 파편이 녹아있음을 느낀다.

죽음을 준비하며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내게 되풀이하여 들려준 남편의 마지막 말.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고 내 귀에 맴돌아 울리고 있다. 남은 시간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다가 나 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땐 꼭 잡고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높은 하늘 구름 끝닿은 곳에 갈까마귀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른다.

▶수상소감

누구나 가슴 한켠에 빈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울 수 없는 자신 만의 비밀스런 곳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귀하게 보존될 '참 나'를 만들고 싶습니다. 삶의 동행이었던 남편이 떠난 후 때론 모두 버리고 싶었던 마음을 추스르며 남은 시간 동안 열정을 다해 살아가렵니다. 따뜻한 글로써 빈 터를 메우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오월의 햇살이 여유있는 아침입니다. 마음껏 사랑하고픈 오늘입니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