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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억울한 죽음' 묘비는 알고 있다

"대적한 상대가 항복해 곧바로 죽이지않았는데
심판의 교활한 배반에 오히려 내가 죽는구나"
가족들이 억울한 사연 새겨

1800년 전 로마 묘비석 해석

"상대를 꺾은 뒤에도 난 그를 곧바로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과 심판의 교활한 배반은 오히려 나를 죽였다."

3세기 로마제국 시절 어이없는 심판 판정으로 생을 마감한 한 검투사의 사연이 1800년 만에 밝혀졌다. 단서는 묘비였다. 100여 년 전 터키에선 로마시대 묘비(사진) 하나가 발견됐다. 현재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이 비석엔 한 검투사가 2개의 칼을 들고 있고 또 다른 검투사가 땅에 주저앉은 채 손을 내밀며 항복 표시를 하는 장면과 수수께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다.

단순히 검투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됐던 이 비석은 그러나 승리한 검투사가 억울하게 경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미국 과학전문 웹사이트 라이브사이언스닷컴이 20일 보도했다.



마이클 카터 캐나다 브록대 교수에 따르면 묘비의 주인공은 디오도루스란 검투사다. 묘비에서 칼 두 자루를 든 검투사가 바로 그다. 로마시대 검투사인 그는 터키 흑해 남부 연안 도시인 아미수스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줄곧 검투사 생활을 했다.

그가 살았던 때는 바로 로마제국이 서쪽으로는 영국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시리아의 유프라테스강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며 최전성기를 구가한 시기다. 그는 한 검투 경기에서 데메트리우스란 상대를 만난다. 오랜 격투를 벌인 끝에 데메트리우스에게 항복을 받아 내기에 이른다. 묘비 그림은 이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디오도루스는 심판의 오심으로 다시 경기를 해야 했다.

검투사가 실수로 넘어지면 잠시 경기를 중단한 뒤 재개한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당시 검투 경기엔 대부분 심판이 존재했다. 또 검투사가 패배를 인정하고 경기 주최자가 이를 허가하면 경기는 끝난다. 경기 중 많은 이가 죽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처럼 한 쪽이 죽어야만 경기가 끝나는 규칙은 없었다.

카터 교수는 "디오도루스는 항복 신호를 보낸 데메트리우스를 죽이지 않았다"며 "곧 승자가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심판은 데메트리우스가 실수로 넘어졌다 판단해 경기를 중단시켰고 디오도루스는 다시 시작된 경기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카터는 "디오도루스의 가족 또는 친구들이 그의 죽음에 분개해 이 같은 내용을 묘비문에 새겼을 것"으로 추정했다. 카터 교수의 연구 결과는 독일에서 출간되는 '고대 금석학 및 고문서학 저널' 최신호에 실릴 예정이다. 검투사 경기는 로마시대의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다. 로마제국의 정치가들과 부자들은 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자기 돈을 들여 검투사 경기를 열었다.

◆검투사(gladiator)= 로마제국 시기 원형경기장에서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맹수가 전투를 벌이는 경기에 참가한 이들을 말한다.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풍습에서 유래됐다.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시작돼 제정(帝政)시기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주로 권력자가 시민 의 인기를 얻기 위한 유흥거리로 열었다. 대부분 출신 성분이 전쟁포로·노예·범죄자였지만 자유인도 돈을 벌기 위해 참가했다. 검투사 경기는 제국 말기인 5세기까지 지속됐다.

이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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