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 플레이스] '3' 의 의미와 부활절
박용필/논설고문
그러고 보면 우리는 숫자 가운데 '3'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 같다. '만세'도 언제나 '삼창'을 불러야 직성이 풀린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삼세번을 해 승패를 가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도 하나 둘 셋이다.
삼세번은 일상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규범이나 정치문화에도 적용된다. 두 번째까지는 용서를 해도 세 번째 잘못을 저지를 경우 혼을 낸다. 법정에서 선고를 할 때도 방망이를 세 번 두들긴다.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건 부결되건 의사봉을 세 번 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처럼 '3'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종결의 의미가 강하다.
서양에선 '3'이 대체로 운(불운이 됐든 행운이 됐든)으로 풀이된다. 기독교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세 번째는 행운(third time is a charm)'이란 말은 흔히 인용되는 문구다. 우리의 삼세번과 비슷하다. 한 두 번 실패했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세 번째엔 행운이 찾아온다는 속담이다. 교수형에 처해진 죄수가 세 번째 집행을 당했는데도 죽지 않으면 풀어줬다는 속설에서 기인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성냥개비 하나에 셋(three on a match)'은 죽음을 뜻한다. 성냥개비에 불을 당겨 셋이 담뱃불을 붙이면 세 번째 병사는 적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는 미신이다. 지금도 미군들 사이에서 불문률처럼 지켜지고 있다.
아무리 미신이라 한들 전쟁터에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 역시 정교회 의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단에 불을 밝힐 때 성냥개비 하나로 초 세개를 켜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에서도 '3'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비의 숫자로 등장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도 셋이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 몰약 등 세가지를 예물로 내놨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와있다.
이 땅에서 서른 세해를 살다간 예수는 공생애 기간이 꼭 3년이다. 숨진 시각도 오후 3시로 기록돼 있다.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잡히기 전날 밤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한 말이다. "오늘밤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장담을 한다.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가 대사제와 백성들 앞에서 심판을 받던 날 "나는 예수를 모른다"며 세 번 발뺌을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 처형 후 사흘날(3일 후)에 죽은이들 가운데서 살아나 '신의 아들'임을 세상에 드러낸다. '3'이란 숫자의 '완결판'을 부활이라 불러도 될 성 싶다.
오는 24일은 기독교 최고의 축제날인 부활절이다. 예배나 미사 시간엔 이른바 'CME'들까지 몰려들어 인파로 넘쳐난다. 1년 중 크리스마스(C)와 마더스 데이(M) 이스터 부활절(E)의 세 날에만 출석하는 소위 '나이롱 신자'를 일컫는 은어다.
나는 혹시 CME가 아닐까.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도 스승을 세 번이나 외면했는데 삼세번의 셋을 곱한 만큼이나 마음을 열면 부활의 참진리를 깨우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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