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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 한인 교회를 가다] 주님의 영광교회 신승훈 담임목사

아프리카 선교 순종했더니 부흥으로 답하시는 하나님

주님의영광교회가 14일 입당한 예배당은 10번과 110번 프리웨이가 교차하는 LA 다운타운 중심에 있다. 겉모양은 허름하지만 내부 규모는 입이 벌어질 정도다. 지난 1932년 LA 올림픽 레슬링.권투 경기장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8000석이던 공간이 예배를 위해 설교 강단과 방들을 만들면서 줄어들었다지만 그래도 좌석은 6000개에 이른다. 치솟은 천장에 사방을 가득 둘러싼 빈자리들은 한눈에 파노라마를 이루며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담임 신승훈 목사가 지켜 온 신앙의 마음이 하나 있다. '교회는 사람이지 건물이 아니다'는 것이다. 출석 교인만 2000명을 훌쩍 넘도록 지금껏 남의 집 살림을 했다.

개척한지 1년 만에 교인이 800명으로 불어나면서 재향군인회관 일부를 빌려 6년을 버텼다. 음향기기 등을 설치 못하게 돼 집회 때마다 크고 작은 예배실의 각종 설비를 매번 붙였다 떼어야 했다. 그게 1년이면 합쳐 1000번을 넘었다. 셋방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겨우 마련한 성전 건물을 LA가 수용하는가 하면 토런스로 이사하려다 취소하는 등 사연이 많았죠. 그러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구입하게 된 곳이 여기예요."

신승훈 목사는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잘린'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학교 예배 시간에 친구들을 몰고 나가 '금지된 장난'의 선봉에 섰다. 시쳇말로 '짱'이었다. 남들은 시험 준비에 정신없는 고3 여름방학도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청춘을 불사르며 지새웠다.

"사촌형이던 교장 선생님의 읍소 덕분에 고3 말 예비고사 합격을 조건으로 간신히 두 번째 퇴학이 유보됐어요. 세 달간 창문에 담요를 두르고 방에 틀어 박혀 공부만 했죠."

내로라하는 대학에 들어선 후에도 음악다방 DJ로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와중에 과외 선생으로 이름을 날려 대기업 과장 수입을 웃도는 호경기가 지속됐다. 군대 생활도 지금 사모가 된 캠퍼스 커플 신분희 여학생의 집 근처 수도통합병원에서 '따뜻하게' 보냈다.

이민 생활도 굴곡은 있었지만 성공적이었다. 마켓 전자오락실 포토샵 콜라공장 등등 비즈니스도 여럿 운영했다. 지금은 월세 아파트에 살지만 미국영화 비디오샵을 다섯 군데나 거느리며 5만달러 월수입을 누리던 1988년은 '세상 인생'의 절정이었다.

교회야 미국 와서 6년째 다니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남의 일이었다. "당신 진짜 하나님 봤냐?" "죽고 나서 생명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떻게 안 믿는다고 지옥을 보낼 수 있느냐?" 당시 그의 3대 주장이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집사가 던진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이 시작이었다. 성령의 세례를 깨닫고 가게를 처분하며 신학교에 가기까지 채 5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은혜한인교회 김광신 목사 밑에서 성장하고 안수 받은 뒤 아프리카 케냐에서 5년간 선교했다. 슬럼가에서 제일 큰 술집을 사들여 미션스쿨을 설립하고 신학교를 통해 200여 교회를 세웠다. 과로로 병이 들어 치료차 방문한 그에게 김 목사가 교회 개척을 권했다.

"돈 소유 성취감 저도 이런 걸 찾았었죠. 그러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요 은혜를 알고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정말 세상을 보는 눈이 기뻐지죠. 근본적으로 행복해지는 거예요. 인생의 가치는 믿음을 통해서 발견할 수밖에 없게 돼 있어요."

글:유정원 기자

사진:임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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