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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영화만담]숨결들의 강렬한 접촉<크래쉬>

인체의 변형과 숨겨진 본성에 집착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감독이 1996년 연출한 영화 <크래쉬> 에서는 자동차 충돌을 통해 성적충동을 보상받는 기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을 보통의 중산층으로 보이는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익명의 그리움을 자신이 탑승한 -문명의 이기로 대표되는- 자동차의 충돌과 섹스에 대한 노골적인 탐욕을 통해 해소한다.
보여주는 이야기가 다소 과격하고 낯설었지만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이 작품을 통해 나날이 거대해지는 사회 속에 더욱 소외되어만 가는 개인들의 건조한 일상과, 더불어 공허하게 공명할 뿐인 절규를 자신의 악몽과 같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대변했다.

“L.A.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인간은 서로 정을 느끼고 살고 싶어해. 그렇게 정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 서로 충돌하게 되는 거야”

오늘 소개할 영화 <크래쉬> 의 시작을 여는 이 첫 대사는 극중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 워터스(돈 치들 扮)’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는 추돌 사고 직후 뭔가에 홀린 듯 이처럼 읊조리고, 동승했던 연인이자 동료인 ‘리아(제니퍼 에스포시토 扮)’는 시급한 사고상황에 넋 나간 듯한 그의 말을 사고충격의 후유증 정도로 무시해버린다.
오프닝 크래딧을 위한 몽상적 이미지들의 나열 끝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역할도 하고있지만, 이 영화가 약 2시간동안 관객들에게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를 가장 명확하고 함축적으로 설파하고 있기도 하다.
문명과 번영이란 이름 속에 멀어지는 개인... 공교롭게도 이 대사의 함의는 앞서 소개한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영화인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맞닿아있다.

영화 <크래쉬> 는 2004년 캐나다 토론토 영화제(Toronto Film Festival)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작년 미국 개봉이후 비평과 흥행 면에서 꾸준히 입지를 굳히며 명성을 쌓아올린 영화이다.
작년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밀리언달러 베이비> 의 각본을 썼던 ‘폴 해기스’가 스스로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전작의 명성에 힘입어 작은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반응과 성과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결국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는 이 작품에 영예의 작품상과 각본상, 편집상을 안겨주며, 그 소문이 헛되지 않은 것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시종일관 노골적인 인종과 계급문제가 언급되는 이 날카로운 영화를 놓고 정작 감독인 ‘폴 해기스(Paul Haggis)’는 단순히 그런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strangers)과 그들이 지닌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고 술회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의 주장만으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따뜻하고 녹녹한 전개의 영화가 아니다. 되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집요하고 영악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어린 아이처럼 관객의 촉각을 곤두서게 만든다. 이런 영화의 특성은 다음의 영화 평이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설교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한 방 날린다 (Despite its preachy moments, the film is a knockout) - ROLLING STONE

이 영화의 뛰어난 각본의 수훈은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는 기묘한 인연을 박진감 있게 엮어 가는 솜씨에 있다. 그 안에는 몽롱하지만 보는 이의 의식을 주도하는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현실적이면서도 드센 대사와 치밀한 계산으로 조율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역시 포함된다.
적지 않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모두 뚜렷한 개성과 납득할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영화의 핵심을 벗어나지 않는 딜레마를 공유하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선과 악의 경계로 나뉜 그들로 보이지만 작가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또 가중시키기도 한다. 이로서 인물들은 온전한 이분법으로 평가 불가한 무력한 존재성을 부여받고, 결국 관객들은 늘 보아오던 영화 속 획일적 인물들을 넘어선 생동감 있고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들은 이 영화가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이 1999년 연출했던 걸작 <매그놀리아(magnolia)> 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전부터 많은 등장인물들이 특별한 주제나 매개체를 통해 하나로 엮이는 형태의 영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그놀리아> 는 표면적 연결고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관객들에게 등장인물 다수의 내면을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관망케 하는 놀라운 경험을 선물했었다.
<크래쉬> 는 그런 장점들을 충분히 재현해낸다. 그러나 <매그놀리아> 가 개인간의 소통과 인간 본질의 존재론을 정적으로 탐미한데 비해, <크래쉬> 는 인종문제라는 현 미국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을 정면에 드러냄으로서, 현학적 철학과 정서의 낭만을 넘어선 실제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 쟁점을 겨냥한다. 이는 이 영화가 이제까지 무수한 걸작들 속에 안주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간 결과물로 평가받는 가장 큰 차이이자 장점으로 보인다.


영화의 내용은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큰 곤욕이 될 정도로 많은 인물들의 많은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다. 단 L.A.라는 공간적 무대에 살고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 극에 등장하는 10여명의 인물들은 나이도, 성별도, 피부색도 모두 가지가지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그들 모두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 질식하게 만든다. 그 공기는 더욱 치열하게 생존하고자 그들 스스로의 가쁜 숨결에서 분출된다는 점을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쉽게 인정할 수는 없다. 어느 샌가 그들은 스스로를 위협하고 분열시키는 이유를 피부색과 태생에 대한 선입견이라 고스란히 떠 안고 살아간다. 어느 정도는 그들이 옳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들은 틀렸다.
영화는 이 단순하고 한심한 속단을 똑똑하게 열거하지만 그 결과에 관하여는 그리 긍정적으로 속단하지 않는 신중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온전한 해피엔딩이란 영화 속에나 존재함 또한 이 영화는 현명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다민족 공존의 표본처럼 보이는 이 작은 도시에서 펼쳐지는 만 하루동안의 현실적 환타지는 비단 머나먼 남의 땅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강렬하다.
국적을 떠나 같은 민족 안에서도 지역과 계층 간의 부조화를 암묵적으로 종용하는 사회, 때론 자아 이외의 어떠한 가치도 멸시되어버리는 이기심이 타협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존재하는 그 어느 곳에서나 피할 수 없는 본연의 오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간 본연의 오류를 냉철히 포착하고 경계하여 스스로를 소외와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옭아매는 피폐함을 끊어내려는 ‘서로’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그리고 희생이라고 영화는 강렬히 말하고 있다.


크래쉬 (Crash)
2004년/ 미국, 독일/ 113분/ 드라마
감독: 폴 해기스
출연: 맷 딜런, 탠디 뉴튼, 돈 치들, 라이언 필립
개봉연월일: 2006.04.06.목
★★★★★★★★ (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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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현씨는 영화감독. ‘세상에서 가장 작고 재미난 영화사’ 우하하 필름의 대표. 1999년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로 여러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했고, 2001년엔 문소리가 출연한 단편영화 ‘외계의 제19호 계획’으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최명국씨는 영화평론가. 경향신문 및 “무비 위크”에 비디오 칼럼 연재.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리뷰어 역임. 현재 영화 데이터 베이스 “KMDb” 기획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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