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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21세기에 다시 읽는 이순신7

잘못 알려진 임진왜란의 무기들

임진왜란의 역사교육중 가장 잘못된 부분이 무기에 대한 오인이다.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이 이순신 이라면 이순신의 일등무기는 단연 화포였다. 그래서 이 화포의 기본기술인 화약을 개발한 고려말의 최무선을 [임진왜란의 소리없는 일등공신]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조선수군의 주력인 판옥전선이나 거북선에는 배의 양쪽으로 각각 6문씩 12문과 앞뒤 두세개를 합하여14문 내외의 화포를 장착하고 있었고 여기서 발사되는 차대전, 장군전등 섯가래만한 대형 나무화살은 그 사정거리가 500~800m 인 반면 왜군의 조총은 유효사거리가 50m 정도밖에 안되니 육전과 같이 접근전을 할 수 없는 해전에서는 이로써 이미 결판이 난 셈이다. 현대전의 대포와는 달리 당시의 화포는 포탄을 쏘는것이 아니고 대형화살이나 쇠공을 쏘아 그 충격파괴력으로 적의 배를 부수는 것이었다.

두번째로 공헌을 많이한 무기는 조선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고려말 이조초에 걸쳐 그 대책이 국가적 과제가 되어오다가 우수한 전함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까지는 인식을 같이 했으나 성종 연산 중종 명종대에 걸쳐 배가 다소 작더라도 숫적으로 많이 만드는것이 옳다는 소함주의자와 척수는 적더라도 큰배를 만들어야 된다는 대함주의자가 대립하던 끝에 명종대에 이르러 천만다행으로 대함주의자가 승리하여 탄생한 대형 목선으로 밑이 상자 또는 뗏목 모양으로 평평한 평저선으로 화포의 발사충격을 잘 견디고 왜구가 기어 오르기는 어렵고 활은 내려 쏠수 있게 하기위하여 선체를 높이 만들었는데 특히 질긴 조선 적송으로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으로만 만들어 체질이 강인한 명품으로 당시 한중일 동양 삼국전선중 가장 우수한 전함이었다. 이순신은 실전에서 이 체질적 강인성을 십분 이용하여 부딪쳐 부수기인 당파전을 즐겨 썼다.

 일본과 중국의 함선은 밑이 역삼각형과 같은 첨저형으로 속도에서 유리한 점이 있으나 화포발사 충격을 잘 견디지 못해 왜군은 몇개 안되는 철포를 조선수군처럼 갑판에 놓고 쏘지를 못하고 그네처럼 밧줄로 매달아 놓고 쏘았으니 조작이나 조준이 제대로 되기가 어려웠고 체질적으로도 약하여 조선의 판옥선과 부딛히면 먼저 깨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전란말기에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수군의 보강책으로 판옥선 두척을 빌려준 일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판옥선에 화포를 장착하면 강력한 전함이 되었던 것이니 우리조상의 슬기가 감탄스럽다.

 단 3척뿐이었다 (소토오카 진자에몬의 고려 선전기, 나주목지 나대용편). 판옥선이 많을 때는 160여척에 이른것과 비교하면 거북선이 주력전함이 아니었음은 자명해진다. 그러나 철갑 거북선은 가장 긴요한 때에 가장 긴요한 곳에서 가장 긴요한 역할을 신통하리만큼 만족스럽게 해낸 조선의 또다른 기발한 창제품인데 신기하게도 임진왜란 발발 바로 하루전인 1592년 4월 12일 화포실험을 끝낸것으로 일기에 기록 되어있다.

 이순신의 2차 출전인 사천해전부터 투입되기 시작한 거북선의 역할은 돌격선으로 맨앞에서 적진속으로 뛰어들어 쏘고 부틷혀서 일거에 적군을 통제불능의 혼란속으로 몰아 넣는 역할인 것이다.

거북선의 실전 활약상에 대하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임진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왜함대에 승선 종군한 69세의 소토오카가 기록한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이씨조선을 고려로 쓰고 있음) 에 "아침 8시부터...그중 3척은 장님배(거북선의 왜측별명)인데 철판을 입혔고 석화시 (길이 2m 가까운 굳은 나무로 만든 대형화살-차대전 인듯), 오가리마따 (장군전인듯)등을 쏘면서 오후 6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것이다."라고 기록하여 그 처절한 패전참상을 생생하고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당시의 조총은 두꺼운 참나무 방패판도 뚫지를 못했으니 철판을 씌운 거북선의 접근화포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 이었던 것이다. 이 거북선은 구조적으로 판옥선에 등판을 붙이고 철갑과 쇠못을 박은것으로 이순신의 발명이라기 보다는 이순신의 개발품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서울공대 조선공학과 김재근 교수). 그 근거로는 태종대의 기록에 임진강에서 수전연습을 하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며 거북을 보고 착안했을것이라는 주장은 다분히 우화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거북선에는 목이 위로 솟은 좌수영 귀선과 목이 움츠려들어 몸통에 붙어 있어서 그 입으로 화포를 발사할 수 있게한 통제영 귀선등 두 모델이 기록에 남아 있다. 승선인원은 거북선 판옥선 모두 140명 정도이고 동력이 없는 시대이어서 그중 90~100명 정도가 노를 젓는 노꾼이었다.

네번째는 조선의 독창적 화살 편전(片箭-애기살)이다. 보통의 화살 길이가 80~85cm인데 반해 편전은 36~50cm 밖에 안된다. 활을 힘껏 당겼을 때 활과 화살을 잡은 두손의 거리가 70~80cm 나 되기때문에 이 편전을 쏘기 위해서는 대나무를 쪼개어 속을 파낸 "통아"라고 하는 일종의 탄도 보조장치를 써야 했다.

이 편전의 장점은 화살이 가벼워 멀리 쏠 수 있으며 "통아"를 쓰기 때문에 정확도와 명중률이 높고, 적이 이 화살을 줍더라도 통아와 사격술이 없어 되돌려 우리쪽으로 쏠 수가 없다는 3중의 잇점이 있었다. 조총에 비해 화살이 단연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조총이 치명상을 입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사정거리가 50m 정도밖에 안되고 발사준비의 간격이 있어 속사가 어려운 반면, 화살은 치명률은 낮으나 멀리 쏠수 있고 연속사격이 가능하여 접근전을 허용치 않는 해전에서는 훌륭한 무기로 그 역할을 다했다.

이와같이 이순신은 우리 조선수군이 보유한 무기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 확신하고 이를 십분 활용하므로서 그 많은 왜적을 제압했던 것이다. 이것이 곡 지장이며 승장인 이순신과 용장이며 패장인 원균의 차이인 것이다.

 이미지 설명
1. 왜수군 총대장 구키요시다카 가문에 소장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총통용 화살 전체 길이 168 cm.
2. 평저선 (판옥선 및 거북선)
3. 화포에 장착된 장군전 (해군 박물관 소장 모형)
4. 일본 . 중국형 첨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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